뻔뻔한 푸틴 통치 21년…“스스로 러 영광 복원 메시아 됐다”

  • 뉴시스
  • 입력 2022년 3월 28일 15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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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15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쾨테, 쉴러, 칸트를 빌어 러시아는 유럽 우호국가”라고 선언했다. “유럽의 항구적 평화가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라고 강조한 끝에 독일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독일어로 온건한 발언을 이어간 그를 믿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랬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 우크라 침공 반대자들을 서방의 “제5열”이라고 부르며 “러시아 국민들은 입속으로 날아들어온 곤충처럼 그들을 뱉어내 사회가 스스로 정화될 것”이라고 했다.

21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7일(현지시간) 푸틴이 22년 동안 변해온 과정을 추적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다음은 기사요약이다.

21년 동안 중국이 부상하고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실패했다. 전세계는 기술로 연결됐지만 러시아에선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서방이 순진하게 푸틴에 속았던 것일까? 아니면 푸틴이 복수에 눈이 먼 전쟁광으로 변한 것일까?

푸틴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지만 많은 것이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서방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러시아는 물론 그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해를 거듭하면서 불만을 키워온 푸틴은 스스로가 국가요 러시아요 자신의 운명이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복원하는 메시아가 됐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은 푸틴으로선 “서방은 대 러시아를 복원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했다. 푸틴은 “소련 분할로 타국에 남은 조국 러시아의 국민 2500만명이 외국에 발이 묶인 것을 애통해 하면서 거듭 이 문제를 거론했다. 그가 소련 제국의 패망이 20세기 최대 재앙이라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소련 패망 후 러시아에 닥친 혼란을 푸틴은 큰 수치로 받아들였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수석외교보좌관 크리스토프 호이스겐은 “푸틴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증오했다. 서방이 러시아를 도왔다는 것을 못견뎌했다”고 말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 출마한 푸틴은 권력을 국가에서 시장으로 이전하려는 서방의 노력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큰 공약이었다. 그는 “국가는 질서의 원천이며 변화의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푸틴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신흥부호들과 함께 혼란스럽고 자유로운 정실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그러나 절대적 충성을 보이지 않은 신흥부호들을 제거했다. 푸틴은 집권 초기 서방에 개방적이었다. 2000년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할 수 있다고 말했고 1994년 체결된 러시아-유럽연합(EU) 협력 협정을 유지했다. 2002년엔 나토-러시아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인”으로 여겨졌다.

그는 세심하게 행동했다. 푸틴은 2017년 “푸틴 인터뷰”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에게 “자제력을 잃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자신이 “인간관계의 전문가”라고 평했다. 푸틴의 연설에 속은 건 독일 의원들만이 아니었다.

실비 베르망 전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대사는 “KGB(국가보안위원회) 출신인 푸틴으로선 거짓말은 직업이며 죄의식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푸틴은 독일 의회 연설보다 몇 달 앞서 2001년 6월에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만났다. 부시는 푸틴의 눈에서 “영혼을 느꼈다”면서 “솔직하고 믿을 만하다”고 평했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속아서 1996년 푸틴을 후계자로 지정했다.

푸틴은 2003년까지 검소했다. 그런 푸틴이 몇 시간씩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자신이 우월한 사람임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려는 행동이다. 개를 무서워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와 면담 자리에 개를 데리고 나타난 것도 같은 행동이다.

NYT와 인터뷰한 자리에서 푸틴은 예의 바르고 진중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강력히 고수할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정신과 문화면에서 유럽인”이라고 했다. 이라크 전쟁을 벌이는 부시 행정부와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인권, 언론자유 등 인도주의 원칙이 모든 나라의 근간이 돼야 한다”면서 “법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고 했다.

그 시기 푸틴은 이미 독립 언론을 탄압하고 있었다. 체첸을 침공해 수도 그로즈니를 초토화했다. 정보기관 출신을 정부 요직에 발탁했다. 정보 기관 출신의 첫번째 수칙은 의심이다.

이에 대한 질문에 푸틴은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거울을 탓할 순 없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고 답해 미국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1952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푸틴은 나치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 영향을 받으며 컸다. 러시아에선 이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 맏형은 전사했으며 할아버지는 스탈린의 요리사였다. 러시아가 치른 희생을 가족의 아픔으로 직접 겪었다. 푸틴은 어려서 “약하면 얻어 맞는다”는 것을 터득했다.

푸틴은 대통령이 된 초기 8년 동안 경제에 집중했다.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선임 연구원 알렉산데르 가부에프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자유로웠던 행복한 시기”라고 회상했다. 가부에프는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터키 이스탄불로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11개의 시간대가 있는 지상 최대의 국가가 다시 부쩍 일어서기 위해선 경제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지아의 장미혁명, 발트해 3국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의 나토 가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은 모두 서방에 경도된 러시아 거부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푸틴은 서방과의 협력 노선에서 대립노선으로 전환했다. 메르켈 전 총리가 푸틴에게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당신을 믿은 일”이라고 답했다.

2004년 푸틴은 주지사 선거를 폐지했다. 러시아 TV는 옛 소련 시절 선전으로 가득한 TV로 변해갔다. 2006년 체첸 공격을 비판한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가 푸틴 생일 날 모스크바에서 살해됐다. 러시아를 마피아 국가라고 말한 정보원 출신 알렉산데르 비트비넨코는 런던에서 러시아 정보원에 의해 방사성 독약에 암살됐다.

푸틴은 나토의 확장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배신의 표상으로 받아 들였다. 러시아 문턱에 도달한 서방 민주주의를 자신의 억압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은 “나토보다 민주주의가 푸틴에게 더 큰 악몽”이라고 했다. “제국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대국 러시아의 바탕으로 설정한 뒤로 수천명이 키이우 길거리에 쏟아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푸틴은 서방화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이라고 했지만 그보다는 푸틴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다.

약한 것을 경멸하는 푸틴은 2006년 즈음부터 폭력적 성향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필요한 서방은 이를 묵인했다. 9·11 사태 뒤 처음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한 푸틴은 대테러 전쟁에서 믿을 만한 동맹이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체첸 공격을 기독교를 위한 문명전쟁으로 옹호한 푸틴의 주장을 주목하지 않고 흐지부지했다.

2005년 러시아 대사였던 윌리엄 번즈 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당시 냉전 이후의 낙관론은 모두 사라졌다는 전문을 보냈었다. 러시아의 “강대국 심리가 조만간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푸틴은 몇 년 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을 “양키”라고 경멸적으로 불렀다. “양키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뒷자리로 밀어냈다”고 했다. 또 나토는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하는데 사용하는 “공격적 기구”라고 했다.

푸틴은 권력을 공고화하면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도 키웠다. 1999년 베오그라드 공습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미국이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위반한 사례라고 단골로 꼽았다. 2007년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서 “한 나라, 물론 미국이 이러저러하게 국경을 침범해왔다”고 선언해 청중을 놀래켰다. “하나의 주인, 하나의 주권은 치명적이며 극도로 위험”하다고 단일 초강대국 미국을 비판했다.

한편 나토의 확장문제가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번스 대사는 2008년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엘리트로선 금지선을 넘는 것”이라고 썼다. 푸틴은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방문중 한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억지로 만든 나라며 1700만명의 러시아인이 살고 있고 키이우는 러시아 도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푸틴은 당시만 해도 공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부시 미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을 흑해 연안 휴양지 소치로 초대해 동계올림픽 개최 상황을 자랑했고 자신을 이어 대통령이 될 메드베데프 총리를 소개했다. 코사크 춤 공연이 있었고 미국인들도 함께 춤을 췄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3개월 뒤 조지아 5일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평화유지 작전이라며 침공했다. 조지아가 나토에 가입하는 걸 차단하려는 전략적 목적이 배후에 있었고 목적을 달성했다. 모스크바는 조지아에서 아브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떼어내 러시아에 합병했다. 푸틴이 처음으로 모래사장에 선을 그었지만 서방은 사실상 무대응이었다.

2012년 5월7일 모스크바에 시위가 한창인 속에서 푸틴이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여러면에서 면모가 달라진 모습이었다. 부정선거에 항의해 “푸틴은 도둑”이라고 외친 시위대를 보고 푸틴은 미국이 러시아에 색깔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확신했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향해 “이 나라 일부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했다.

미국은 알카에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푸틴의 경고를 무시했다. 미 대선에서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가 미국의 최대 지정학적 위협은 러시아라고 하자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냉전이 20년 전에 끝났다”고 조롱했다.

러시아는 2011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리비아 군사개입 표결에서 기권했다. 카다피가 살해되자 푸틴은 미국이 국제사회의 무법자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굳혔다.

푸틴에게 중국의 부상은 서방의 몰락을 의미했다. 시리아 주재 전 프랑스 대사 미셸 뒤클로는 푸틴이 2008년 경제위기로 서방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했다. “그때부터 대립하기로 방향을 정했다”는 것이다.

푸틴은 미국과 동맹국들이 민주주의 진작과 인권 보호를 앞세워 동성혼, 급진 페미니즘, 동성애, 대량 이민 등 방종을 확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귀한 러시아가 이런 해로운 동성화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푸틴주의는 얄팍한 무신론에 맞서는 것이 됐다.

푸틴은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에서 “힘든 시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여자가 아니다. 힘들 때는 없었다”고 답했다. 스톤이 동성애자와 군대에 대해 “잠수함에서 동성애자와 함께 샤워를 해도 괜찮으냐”고 묻자 “그러고 싶지 않다. 그를 자극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렇지만 난 유도 유단자다”라고 답했다. 그의 이런 생각이 유럽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프랑스 극우 민족주의 정당 프랑스 국민전선에 자금을 지원했다.

푸틴은 2013년 키이우 대공 기독교 개종 1025주년을 기념해 키이우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공통의 조국 대 러시아”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시코르스키 전 폴란드 외무장관은 “폴란드는 여러번 러시아에 침략당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단 한번도 침공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러시아어 소수민족을 돕기 위해 왔다고 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푸틴은 집권 22년 동안 갈수록 뻔뻔해져 왔다. 러시아에 질서를 복원하겠다더니 국제 사회의 존중을 받겠다고 했고 석유수입이 늘어나고 첨단무기를 갖게 되자 군사력을 행사해도 서방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2018년 3월 첨단 핵무기와 극초음속 미사일을 크게 선전하는 동영상에서 푸틴은 “아무도 우리 말을 듣지 않았지만 지금은 듣고 있다. 러시아를 억제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푸틴을 처음 만났을 땐 수줍어 하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과대망상가가 됐다”고 평한다.

2013년 시리아가 자국민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미국의 금지선을 넘은 것으로 판단한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와 개전을 논의했지만 시리아가 미국의 위협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화학무기를 폐기해 흐지부지된 적이 있다.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이 머뭇거린 뒤 “푸틴이 오바마가 약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푸틴은 러시아의 힘을 투사하는데 몰두한다. 2014년 크름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2016년에는 시리아에 군대를 보내 알레포를 초토화시켰다.

거짓과 잔인함이 푸틴의 수단이 됐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15년 뮌헨안보회의에서 우크라이나가 유태인과 러시아인을 상대로 “민족주의적 폭력”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라브로프의 말을 주의깊게 들은 서방 지도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커지고 있지만 억제되고 있다고 믿엇다. 푸틴은 합리적이어서 손익계산이 분명하다며 유럽의 평화가 확고하다고 믿었다.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가 유럽에 쏟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한번도 푸틴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 미 정보기관보다 푸틴의 말을 더 믿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한 고립으로 2500만 러시아인이 조국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는 푸틴의 망상이 굳건해진 것이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무언가 분명 잘못됐다. 푸틴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6m 떨어진 테이블에서 푸틴을 마주한 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푸틴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강경해졌다고 했다. 푸틴의 얼굴마저 부은 것처럼 보였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한 연설은 “편집증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푸틴은 여름 내내 직접 5000단어가 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합”이라는 글을 써서 군대에 배포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약탈당했다”면서 우크라이나가 “급진주의자와 신나치주의자들의 온상”이 됐다고 했다.

그의 야심은 우크라이나 침공 몇달 전에 이미 선명했다. 서방이 오래전부터 분열되고 약해졌으며 방종적이라고 믿게 된 푸틴은 독일에 새 총리가 취임하고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중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한 상태가 적기라고 믿었다. 러시아군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정보 판단은 없었다. 독일 전 총리 자문관 토마스 배거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푸틴이 시간이 얼마 없다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푸틴이 자신의 성공에 도취했다”고 했다. 크름반도, 시리아, 벨라루스, 아프리카, 카자흐스탄 등등. “푸틴 스스로 ‘모든 곳에서 전진했는데 후퇴해야 하는 곳이 있나? 없다’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그건 오판이었다. 푸틴은 단번에 나토를 결속시키고 스위스의 중립을 끝냈으며 독일의 전후 평화주의를 중단시키고 분열된 유럽연합(EU)를 단결시켰으며 러시아 경제를 파탄시켰다. 러시아인들이 대거 출국하고 무엇보다 푸틴이 부정했던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그가 조롱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기민하고 용감하게 대처해 푸틴을 압도하고 있다.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푸틴이 주워담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푸틴을 “전범, 살인마”라며 “단언컨대 그가 권좌에 있어선 안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푸틴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보안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핵전쟁 위험성이 한달 전보다 커졌다. 침공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억지, 스탈린 시대 학정을 비난하는 메모리얼 인터내셔널 해산, 독립 언론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를 전체주의 국가로 되돌리고 있다.

푸틴이 21년전 독일 의회에서 연설할 때 기립박수를 쳤던 노르베르트 뢰트겐 당시 의원은 “이젠 푸틴이 이기거나 지거나다.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패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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