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뒷날개]질서를 파괴할 때 삶은 더 풍요롭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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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지음·정지인 옮김/300쪽·1만7000원·곰출판

과학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집었다. 저자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보디상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 룰루 밀러. 저자는 미국의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나간다.

책의 한쪽에는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에 이름을 붙였던 조던이 상징하는 질서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실험용 쥐를 요리해 먹고, 실험에 방해되는 옷소매를 모조리 잘라내곤 했던 생화학자인 저자의 아버지가 말하는 혼돈이 있다. 청소년기 자살 충동과 20대 실연으로 인해 삶에 극심한 혼돈을 겪던 저자는 자신의 삶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조던의 삶에 빠져든다.

조던의 80년 생애는 단순하게 요약되지 않는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생명에는 위계가 있다고 고집했던 조던은 전쟁터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죽는다는 우생학적 이유로 전쟁을 반대한 인물. 그는 미 스탠퍼드대의 초대 총장을 지내면서 스탠퍼드대 창립자의 사망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사회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들 것을 주장한 그의 삶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특히 세상 만물을 분류하기 위해 노력하던 조던의 열정은 21세기에 와서 무의미해진다. 조던의 옛 분류법과 달리 물에 살고, 몸에 비늘이 있다는 특성만으로는 ‘물고기’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분류학의 결론이다. 실제로 내부 장기의 구조상 ‘폐어(肺魚)’는 ‘연어’보다는 ‘소’와 가깝다. 충격적인 결론이지만 조던이 살아 있었다면 이 결론을 받아들였으리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이제 저자의 질문은 ‘나에게는 이게 무슨 의미인가?’로 옮겨진다.

이 책은 질서 대 혼돈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난다. 저자가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계기는 사랑이라는 비약적인 경험이다. 여성인 저자가 다른 여자와 키스를 하면서 스스로 받아들이게 된 양성애자라는 성적 지향은 물고기와 인간 사이에서 차이보다 유사성을 찾는 일과 포개진다. 물고기가 그냥 고기가 아니라 함께 수영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일이다.

인간 자체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인문에세이로도 분류된다. 과학이냐 인문이냐를 벗어나 논픽션의 성패는 자신의 이야기를 노출하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기술에 달려 있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일 따름이니 저자가 이 책을 끝까지 쓰게 한 의미는 사랑이다. 내가 편집을 맡은 저자들과 더 많은 사랑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인문사회팀장
#뒷날개#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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