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겜 녹색추리닝, 새마을운동 연상하지만 현재는 낙오자 이미지”

  • 뉴시스
  • 입력 2021년 11월 12일 10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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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담은 황동력 감독의 히트작 오징어게임의 등장인물들이 입은 번호가 매겨진 녹색 의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놈코어(normcore) 의상으로 한국 사회의 계층, 정치, 역사에 대한 논평을 담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놈코어는 영어의 평범하다(normal)는 단어와 강렬하다(hardcore)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트렌디한 패션에 대한 반발로 일부러 디자이너 이름이 붙지 않은 소박하고 평범한 의상을 고르는 패션을 뜻한다.

럿거스대학교 정재원 교수는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에 대한 드라마”라면서 추리닝에 대해 “수준이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

인디애너 대학교의 신준영 패션디자인 교수는 추리닝이 현대 한국 문화에서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면서 “녹색 추리닝을 보면 ‘백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낮시간에 추리닝을 입고 동네 상점으로 가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거나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낙오자”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또 오징어게임 출연자 추리닝에 매겨진 숫자들 가운데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에 매겨진 1번이라는 숫자는 그가 승리할 것임을 암시한다. 한국 사회의 노인빈곤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뉴욕패션기술대학교 편경희 예술사교수는 오징어게임의 녹색 추리닝이 2013년 영화 “위대하게 은밀하게”에서 “마을 청년” 백수로 위장한 채 북한 스파이로 암약하는 주인공 김경수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후드가 달린 녹색 추리닝을 입었다는 것이다.

편 교수는 “교복이 규율 잡힌 행동과 시민 규범을 상징한다면” 체육관이 아닌 곳에서 추리닝을 입고 있는 건 한국 영화에서 “흔히 사회에서 낙오한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또 맵시있게 옷 잘입기로 유명한 서울 시민들에게 녹색 추리닝은 다른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황감독 스스로 이 의상이 자신이 1970년대 입었던 학교 운동복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패션편집자 겸 사진작가 홍석우씨는 “오징어게임에 나온 녹색 추리닝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개성이나 취향이 담긴 옷이 전혀 아니다. 요새 우리가 ‘레트로’ 또는 ‘신 빈티지’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파란만장한 현대사 때문에 ‘뉴트로(newtro)’에 대한 열정은 일본이나 미국 빈티지 스타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민통치, 독재, 민주화, 급속화 현대화 등의 역사가 작용한 것이다.

편 교수는 1970년대 서양식 추리닝을 입은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거나 대도시에 사는 사람으로 간주됐으며 청바지나 미니스커트 같은 서양식 의상 스타일이 수수한 전통 의상을 대체하기 시작한 때라고 말했다. “학교나 회사 로고가 붙은” 추리닝이 “질시의 대상이었고 그런 옷이 없는 성인 남자는 깔보이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오징어게임 예술감독 채경선씨는 새마을운동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신 교수는 “우리 세대는 녹색이 공직자의 상징이 된 걸 두고 농담을 하곤 한다”면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새마을 운동을 귀아프게 들었다. 매일 아침 학교나 마을에서 새마을운동 노래에 맞춰 운동하곤 했다. 새마을 운동의 엠블렘이 밝은 녹색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가 가운데 있었다”고 회상했다.

스탠포드대학교 문유미 역사교수는 새마을운동이 “촌사람들에게 정부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정치 시스템”으로 전통문화를 강제 부정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징어게임과 관련된 상징성은 다양하게 관찰된다. 정 교수는 “새마을운동이 집단투쟁과 진보를 상징한다지만 신진보적 맥락에서 보면 승자가 한 사람만 남는 제로섬 게임에 (새마을 운동의 이미지가) 동원됐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반면 진정한 승자도 없다. 오징어게임에서 밝은 분홍색 작업복을 입은 진행요원들은 익명성과 반항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을 연상시키는 게임이 계속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패션 작가 김나씨에 따르면 분홍색은 녹색과 보색관계다.

한류 홍보대사로 활동중인 김나씨는 “한류의 많은 것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는 일종의 아웃사이더가 만든 것들”이라고 했고, 오징어게임을 10년 동안 구상하면서 치아를 6개나 잃어버린 황 감독은 “덕후”의 전형으로, 한류가 더없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정통 방식을 따르지 않는 황감독의 생생한 접근법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편 많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드라마나 영화를 거리낌없이 베끼기도 한다. 오징어게임 만해도 “헝거 게임”과 “배틀 로얄”을 참고했다는 건 전혀 비밀이 아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 지미니 하씨는 “한국 사람들은 적응력이 뛰어나 더 좋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오징어게임의 의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건 의도적으로 칙칙하게 만든 “지독한 앤티 하이패션”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작가 홍석우씨는 “오징어게임이 한국에서 큰 화제였지만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면서도 어찌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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