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이름 없는 영웅’ 의병의 모습 역사에 남긴 영국 기자 매켄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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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 전 세계에 알리다

영국 데일리메일의 종군기자로 대한제국에 왔던 프레더릭 매켄지가 촬영한 의병 사진.
영국 데일리메일의 종군기자로 대한제국에 왔던 프레더릭 매켄지가 촬영한 의병 사진.
우리 정부는 국권 피탈 전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을 선정하고 포상을 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아일랜드인 조지 쇼를 많이 소개합니다. 오늘은 영국 기자로서 의병운동을 취재하고 일제의 폭력적 통치를 세상에 알린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사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받은 학생은 의병 사진을 보거나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겠지요. 1907년 촬영된 사진이라 인물과 배경이 선명하지는 않아도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진에 등장하는 의병은 12명입니다. 뒷줄에 있는 3명은 얼굴만 조금 보이고, 나머지 9명은 비교적 복장, 얼굴, 머리의 모습, 들고 있는 총, 허리에 찬 탄띠 등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돋보이는 의병은 오른쪽에서 세 번째 군복을 입은 사람이며, 역사학자들은 이 의병을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의병의 얼굴을 보면 10대 후반 정도로 보입니다. 어린 소년이 어떤 과정과 이유로 의병에 가담하였는지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12명의 의병은 사진을 촬영한 시기와 지역, 해산 군인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13도(道) 연합 의병 세력의 일부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역사학계는 12명의 의병 중 한 사람의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아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독립운동의 위대한 영웅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겠지요.

○ 매켄지의 의병 취재
사진을 촬영한 인물은 영국인 매켄지입니다. 영국인이 어떤 과정으로 먼 나라까지 와서 이 사진을 촬영했는지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매켄지는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후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1900년 영국 런던의 데일리메일 신문기자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1904년, 1906년, 1907년 세 차례 방문을 통해 러일전쟁 상황, 을사늑약 후의 한국 정치 상황, 의병운동의 전개 과정과 일제의 진압 등을 보도했습니다. 특히 1907년 의병운동에 대한 취재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매켄지는 1907년 10월 서울을 떠나 말을 타거나 걸어서 경기 이천, 충북 충주와 제천, 강원 원주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에 의해 많은 마을이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매켄지는 의병 활동 지역을 따라 이동하면서 초토화된 마을, 일본군의 이동 모습,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딸 옆에서 울부짖는 어머니 등의 모습을 촬영하였으나 의병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기 양평에서 의병의 경계병을 만나게 됩니다. 경계병은 이 외국인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요? 경계병은 매켄지를 적으로 알고 포위한 후 체포하려 합니다. 매켄지는 자신이 영국인이라고 말해서 풀려났고 곧 동료로 보이는 의병 5, 6명이 다시 나타납니다. 매켄지는 “5, 6명의 의병들이 마당에 들어서더니 열을 지어 인사를 했습니다. 모두 18∼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중 한 청년의 얼굴이 잘생기고 훤칠했는데, 구식 군대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누구도 가죽 장화를 신은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의병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매켄지는 의병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들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아마 매켄지와 의병 모두 이 사진이 훗날 얼마나 중요한 사진이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볼지 몰랐을 것입니다.

○ 출판 활동과 독립운동 지원
매켄지는 특파원으로서 한국을 방문한 경험과 취재 활동을 바탕으로 1908년 뉴욕에서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개항 이후 한국 정치 상황,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의 여러 만행을 고발하였습니다. 의병운동에 대한 구체적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매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관심은 3·1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3·1운동 당시 ‘타임스’ 주간판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와 프랭크 스코필드 등 친한·반일적 선교사 등이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또 영국 사회에서 급속히 확산하던 반일 분위기 속에서 ‘한국 친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단체에는 영국의 정치인, 학자, 신문기자, 목사 등이 참여하였으며, 창립대회에서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는 한국인을 찬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는 한국 친우회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유럽 독립운동의 중심지를 일시적으로 파리에서 런던으로 옮겼습니다.

매켄지의 언론과 출판 활동은 영국 정부의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행동이었고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영국과 일본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영국 역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인류의 양심과 보편적 가치 체계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신념을 언론과 출판 활동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매켄지가 12명의 의병을 촬영하는 장면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미스터 션사인의 김은숙 작가는 매켄지의 활동과 12명의 의병 사진을 보고 의병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역사 연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문학과 예술의 중요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지금도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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