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국가 대신 자유를!” 검은 옷 입은 혁명가들의 첫 재판

이진 기자 입력 2021-09-03 11:40수정 2021-09-03 11:4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925년 10월 28일
플래시백

1925년 10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실 안팎은 꽤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피고들은 물론이고 방청객들 중에서도 검은색 옷차림을 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뒤 흰옷을 입지 말라고 강제한 탓만은 아닌 듯했습니다. 피고들과 방청객 일부가 품은 이념 때문이었죠. 바로 ‘아나키즘(anarchism)’입니다.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색깔이 검은색이거든요. 한 피고는 호(號)까지 흑영, 즉 검은 그림자였죠. 이날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조직원 9명이 처음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흑기연맹’사건입니다. ‘초유의 무정부주의자 공판’ 제목을 붙인 동아일보 기사는 ‘방청석에는 검은 옷 입은 주의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고 전했죠. 피고들은 같은 해 4월 흑기연맹을 발기했고 5월 전선아나키스트대회를 열려고 했습니다.



‘자유 평등의 인류로 조직된 사회가 아니면 완전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류의 천부적 자유 평등을 해치는 것이 있다면 파괴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흑기연맹 조직원들이 내건 취지입니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절대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만약 자유를 옥죈다고 하면 권력이든 정부든 국가든 모두 타도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도 거부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이 자유를 억누르니까 인정하지 않았죠.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자본가계급의 지배보다 더 나쁘다고 비판했고요. 민족주의운동으로 독립을 얻더라도 권력자가 바뀐 것에 불과하다며 민족주의와도 공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서상경과 신영우는 일본 도쿄에서 박열과 만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서정기는 서상경과 6촌 사이로 인척이었다. 윤우열은 흑기연맹사건 때 검거되지는 않았지만 1926년 허무당선언서를 발표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이기영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해 활동한 소설가로 해방 후 월북했다. 아래 사진 왼쪽은 흑기연맹사건 법정 밖에 모인 군중들이고 오른쪽은 법정에 불려나온 흑기연맹 조직원들이다.


주요기사
법정에 선 흑기연맹 조직원 중 서상경 신영우 홍진유 등은 박열과 관련이 있습니다. 박열은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옥중결혼하며 함께 일제에 맞섰던 바로 그 사람이죠. 3‧1운동 직후 일본에 건너가 아나키즘에 기울어 있던 박열의 허름한 집에서 함께 막일 등으로 고생하며 뜻을 나눴습니다. 박열은 1922년 말 흑우회를, 이듬해에는 행동에 나설 별도조직으로 불령사를 만들었습니다. 위 3명은 흑우회에 가입했고 이중 2명은 불령사에도 가세했습니다. 일제가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험악해진 국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계략으로 박열을 체포했을 때 이들도 함께 붙잡혔죠. 하지만 1924년 박열을 제외하고는 모두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조직한 단체가 흑기연맹이었죠.

동아일보 1925년 9월 18일자에 실린 흑기연맹사건 예심종결서 전문. 5단 세로짜기 원고를 2단 크기로 잘라 이어 붙였기 때문에 화살표 방향에 따라 읽어나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아나키스트들은 투쟁수단으로 테러를 제일 앞세웠습니다. 권력에 맞선다면 살인이나 방화 강도짓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죠. 특히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포를 일깨우려면 테러 말고는 뾰족한 수단이 없기도 했습니다. 무장투쟁은 이들이 군대를 부정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죠. 하지만 흑기연맹은 결성 초기단계에서 적발돼 이렇다 할 투쟁을 벌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박열이 일본에서 조직했던 불령사만 해도 테러라고 해야 고작 친일파 구타에 그쳤고 강연회나 응원전보 보내기를 하는 수준이었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역량이 되지 않았던 탓이었을 겁니다.

오른쪽은 검사가 흑기연맹 피고 9명 전원에게 각각 징역 1년형을 구형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29일자 기사. 왼쪽은 법원이 흑기연맹 피고 9명 전원에게 검사의 구형과 똑같은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는 동아일보 1925년 11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언제나 힘겨운 역경이었습니다. 법원까지도 공개재판을 갑자기 방청 금지했습니다. 치안방해가 염려된다면서요. 흑기연맹 조직원들의 주장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차단하려는 의도였겠죠.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재판 지상중계를 10월 28일자 하루치만 실을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 흑기연맹이 초기에 무너진 배경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밀고가 있었다고 하니까요. 독립운동세력이 우파와 좌파의 양쪽으로 선명하게 갈리면서 아나키스트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신호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나키스트에 안팎의 이목이 다시 집중된 때는 1926년.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박열의 투쟁으로 내각이 무너질 정도였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