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연 중 흘린 눈물…코로나는 나와 엄마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1-08-22 12:12수정 2021-08-2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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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나 리시차 단독 인터뷰
우크라이나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48). 지난해 ‘꽁꽁 잠긴 세계’에서 내한 연주를 펼쳤던 극소수의 해외 연주가 중에서도 생생히 기억되는 이름이다. 지난해 3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온 그는 마스크를 낀 채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 3악장을 연주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연주를 중단했지만 50분에 달하는 앙코르곡을 쏟아놓으며 ‘폭풍 환호’를 불러왔다. 그가 1년 반 만에 다시 온다. 9월 9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피아노소나타 2번, 쇼팽 스케르초 1~4번과 ‘환상 폴로네이즈’를 연주한다. 리시차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지난해 ‘눈물 사건’에 대한 놀랍고도 가슴 아픈 뒷얘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지난해 한국 입출국 전후 총 4주간의 격리를 무릅쓰고 내한해 한국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2013, 2015, 2017년 등 여러 차례 한국에서 연주했습니다. 유튜브 스타로 뜨기 전인 1998년 내한 연주를 보고 기자가 감명 받아 동아일보에 즉시 리뷰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한국 청중에 특별한 애정이 있으신지요?

“연주생활 초기부터 여러 차례 한국에서 공연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스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특별한 청중을 만났죠. 지식이 풍부하고도 열정적인 청중입니다. 이런 청중은 연주자에게 영감을 주고 서로가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할 예정인데, 라흐마니노프는 일기에 ‘미국 순회공연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청중 쪽 오른쪽 귀가 객석의 반응에 따라 튜닝되었다’고 썼습니다. 사람들이 지루해 하면 다음 변주로 건너뛰기도 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때로는 거의 변주 절반을 건너뛰었고, 뉴욕 카네기홀에 가서야 전곡을 연주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일화는 음악가에게 청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청중은 콘서트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 관객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 연주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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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주에서 50분에 달하는 긴 앙코르를 들려주어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긴 앙코르는 습관인지요, 그때만의 특별한 이벤트였는지요.

”앙코르는 정규 프로그램에 맞지 않는 곡들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이며 청중과 특별하고 흥미로운 교감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죠. 지난해엔 50분이었던가요. 시간을 재며 앙코르에 응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특별한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베토벤 ‘하머클라비어’ 소나타 연주 중 눈물을 흘리며 연주를 중단했습니다. 그 이유를 연주 뒤 밝혔지만, 그때를 회상하신다면.

”저는 예전에 예감이란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예감을 믿게 된 것 같습니다. 당시 중간 휴식시간 중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조국 우크라이나가 완전 락다운(이동제한)에 들어간다는 뉴스가 올라왔더군요. 그러고 나서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의 느린 악장을 연주하는 동안 머릿속에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었죠. 그 전까지만 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곧 지나갈 일로 생각되었고, 이렇게 길고 힘든 싸움이 될 걸로는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나는 새 멋진 아파트를 구입한 상태였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엄마와 함께 새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었습니다. 엄마도 짐을 다 싸 두셨죠.

며칠 뒤 프랑스의 한 음악축제에서 이 곡을 또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곡을 준비하면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괜찮아. 몇 달만 기다리면 여행제한이 풀리겠지.’ 어찌어찌 마지막 악장까지 연주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끔찍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일 어머니 안부를 체크하던 이웃 분의 전화였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엄마가 반응이 없다는 거였어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내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쇼팽 스케르초 네 곡을 연주하시는데, 이 곡들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시차에 나흘 앞선 9월 7일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쇼팽 스케르초 네 곡을 같은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지난겨울 락다운으로 이탈리아의 산간 마을에 갇혀있었습니다. 찬 물조차 하루 두 시간밖에 나오지 않는 오지였죠. 여기서 한 독일 오케스트라로부터 슈만의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곡은 연주 효과가 크지 않다는 평이 있기 때문에, 한층 학구적으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주 오래 전 거장의 연주부터 시작해 수십 개의 레코딩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연주 중 단 하나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1876~1957)이 남긴 녹음이었습니다. 옛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 같은 끔찍한 음질이었지만 오히려 최신 녹음보다 더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죠. 이유가 뭘까. 답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명한 소리는 녹음의 특성이 아니라 호프만 자신의 피아노 테크닉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리를 나도 내보자고 생각했죠. 몇 주가 걸렸지만, 나는 결국 성공했습니다. 기술적인 세부에 대해 얘기하자면 너무 긴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이렇게 슈만 협주곡 연주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뒤 나는 쇼팽 시대의 에라르(Erard) 피아노를 통해 쇼팽의 소리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얻은 결과를 한국에서 연주할 쇼팽 네 곡의 스케르초에 적용할 것입니다.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2007년 쇼팽 연습곡을 유튜브에 올리면서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조회되는 피아노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유튜브로 기회를 열고 싶은 연주가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유튜브는 초보자부터 스타급 연주자까지 여러 음악가들에게 수많은 도움을 줍니다. 첫째, 유튜브는 학습 도구입니다. 옛 연주자들의 역사적인 녹음처럼 희귀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교육 도구입니다. 어려운 악절의 운지법(손가락 사용)부터 전문 음악학자의 강의까지 뭐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셋째, 홍보 도구입니다. 직접 자신의 청중과 팬을 찾아나서고자 하는 음악가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물론 위험은 있습니다. 나쁜 댓글에 마음이 상할 수 있죠. 하지만 경기장에 온 다른 팀의 팬들이 야유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떠날 수는 없습니다. 버텨내면 승리할 것입니다.“

―윗세대 작곡가들과 피아니스트들이 내놓은 모든 어려운 기교를 다 소화하는데다가 체력을 소진시키는 긴 프로그램도 문제없이 소화하고 있습니다. 피아노 연습 외 체력훈련도 별도로 하는지 궁금합니다.

”피아노를 치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큰 도전이 아닙니다. 최소한 정신적 도전 만큼은요. 학교에서 체육을 참 못했습니다. 달리기, 수영, 배구 등 뭐든지. 반면 고등학생 때 체스에 매혹돼 순식간에 높은 랭킹에 올랐습니다.

피아노는 물리적(physical)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적(metaphysical) 도구입니다. 계속 소리를 상상해야 하고, 빨리 사라져버리는 음표들을 멜로디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피아노를 물리적으로만 상상하면 금속 현을 양털로 감싼 나무망치로 두드리는 것, 그것뿐입니다. 피아노의 진짜 비밀은 우리의 귀와 뇌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음표가 어떻게 들릴지 잘 한다면 충분한 훈련으로 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걸작을 머리로 들은 다음에 종이에 써낼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 시대의 빈약한 피아노 소리와 그의 후기 소나타를 비교하면 더 경탄을 주는 일입니다.“

―남편 알렉세이 쿠즈네코프도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고 두 분이 듀오 무대도 종종 갖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한 연주를 함께 할 계획은 없는지요.

”남편과 저는 키예프 음악원 동문입니다. 음악원 시절부터 함께 듀오 연주를 했죠.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듀오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듀오 레퍼토리는 많지 않고, 인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갈 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솔로 활동에 주력하게 됐죠.

재작년 데카 레이블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작품 전집을 발매했었는데, 이 중 포핸즈 (피아노 한 대로 두 사람이 연주하는 것) 곡들을 남편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집에서 남편이 한 역할은 연주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프로듀서 겸 편집자 역할도 했죠. 남편은 최신의 기계를 사용하는 일이나 녹음 과정을 좋아합니다. 잘된 일이죠. 알고 보니 난 프로듀서와 결혼한 거였어요!“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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