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희옥 교수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3일 1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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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50여명의 당원, 13명의 대표들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은 9천만명 이상의 당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집권 정당이 되었고, 2021년 창당 100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맞았다. 단일정당이 혁명당에서 통치당으로 그리고 다시 집정당(執政黨)으로 성격을 변모하면서 100년 동안 통치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대한 규범적 평가와는 별개로 내구력의 원천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었고, 경제발전이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비교정치의 오랜 명제에도 충격을 주었다. 사실 미국이 중국과 체제경쟁을 본격화한 것도 중국이 ‘성공의 역설(irony of success)’에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크게 보면 혁명 30년, 건설 30년, 그리고 개혁개방을 통한 발전 30년을 거쳐 ‘신시대’에 이른 100년의 역사이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역사적 합법성(legitimacy)을 부여받으면서 국가건설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원의 정치가 일상화되고 현실에서 유리된 좌편향과 주의주의(voluntarianism)로 인해 실사구시적 문제의식을 잃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개혁개방 30년 동안 꽃이 피었다. 당시의 주요모순은 인민생활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생산력의 부족에 두었다. 이에 따라 ‘대담한 실험’이 나타났고 사회주의와 ‘욕망의 체계’ 사이에서 불평등과 격차의 모순을 잉태했다. 이것은 다시 신시대로 과제로 넘겨주었고 대안의 백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두 개의 백년’ 프로젝트는 창당 100년을 계기로 ‘전면적 소강(小康)사회’라는 중진국으로 진입하고 건국 100년을 계기로 중국적 선진국인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선진국으로 연속적으로 진입하는 데 두었다. 그러나 신시대의 목표는 ‘구시대’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에 기초한 재집권과 ‘강제로 열린 근대’를 초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 부유를 모색하고, 중국담론을 통해 기울어진 국제관계를 바로잡으며, 만연한 기득권, 부패, 권력유착(權貴)을 극복하고,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중국지혜’가 반영된 다자협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와 인류운명공동체라는 공생이론을 제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이처럼 공산당이 지배하는 오늘의 중국은 수축과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이럭저럭 버틸 것(muddling through)이며, 서구적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고도 100년의 지속과 변화에 기초한 중국식 사회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자본주의적 호황은 새로운 번영, 공산당 권력의 강화, 종속과 위기를 가져올 수 있지만, 지구적 층위에서 보면 중국이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질서에 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폭발적인 부상과 코로나 팬데믹 과정에서 보여준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노선, 이론, 제도, 문화에 대한 이른바 ‘네 가지 자신감’을 가지게 했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수동적이고 순응적 태도를 버리고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미국이 동맹과 다자를 동원한 체제경쟁도 미국패권의 상대적 쇠퇴를 반영한 것이며, 인공지능, 빅데이터, 5G, 중국판 GPS를 결합한 과학기술을 둘러싼 게임체인저 경쟁에서 여유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이 해석권을 틀어쥐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만으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정치적 민주화 없는 정치적 제도화, ‘민주’ 없는 집중제, 거버너스 체계와 거버너스 능력의 현대화라는 업적주의(meritocracy) 만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신념의 위기, 일상의 삶을 위협하는 일자리 문제, 성장하기도 전에 늙어가는 중위인구의 질, 감시사회의 피로, 추상적 이익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익을 배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생활의 난제에 해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동원의 마법이 풀리면 언제든지 이러한 문제들은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고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어서고, 부유해지고, 강해지고 난 이후의 중국의 미래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수행할 주체의 문제, 지연된 경제적 재균형 목표의 수립, 탈패권의 기획, 경쟁으로 내몰린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美好)’ 복원할 수 있는 수단, 시민사회를 포용하는 인민사회에 대한 활력 기제가 부족하다. 사실 중국 대중이 공산당의 집정을 수용했던 것은 과거에 얻은 이익, 추상적 이익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익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시대의 기획이 수혜자를 소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공동체의 주역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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