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매케인의 심판[횡설수설/김영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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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존 매케인 당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종합격투기(UFC)를 접한 뒤 “인간 닭싸움”이라며 금지운동을 벌였다. 해군사관학교 시절 권투선수였던 그의 눈엔 규칙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격투기에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경기장을 구하지 못했던 UFC의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당시 부동산 재벌이던 도널드 트럼프였다. 자신의 애틀랜틱시티 카지노를 빌려줬고, UFC는 이 대회 성공을 계기로 규칙 정비 등을 통해 지금의 체계를 갖춘 종합격투기로 성장했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매케인 전 의원과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공화당 소속이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트럼프는 2015년 “전쟁 포로였던 사람은 영웅이 아니다. 포로가 된 적이 없는 사람을 더 존중한다”며 베트남전 영웅인 매케인을 깎아내렸다. 가짜 진단서로 베트남전 징집을 피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트럼프가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매케인은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 고립주의를 앞장서서 비판했고, 트럼프와 러시아 정부 간 유착혐의 의혹 수사를 촉구했다. 그러자 트럼프의 뒤끝이 작렬했다. 그는 매케인을 “해군사관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멍청이”라고 비아냥댔고, 매케인이 타계했을 때 전국적인 애도 분위기 속에서도 추모 성명조차 내지 않았다. 지난해 6월 트럼프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백악관은 7함대에 구축함 ‘존 매케인함’이 대통령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매케인’은 트럼프 백악관의 금기어가 됐다.

▷트럼프의 매케인 비난은 결국 자충수가 됐다. 개표 첫날 경합주 대부분에서 뒤처지며 패색이 짙었던 조 바이든이 판세를 뒤엎은 결정적 계기는 바로 매케인이 35년간 상·하원 의원을 역임한 애리조나주에서 승세를 굳힌 것이었다. 남부의 애리조나는 1952년 이후 공화당의 텃밭이었다. 4년 전 트럼프는 48.1%를 얻어 힐러리 클린턴(44.6%)을 3.5%포인트 차이로 눌렀다. 하지만 매케인에 대한 애정을 안고 있던 주민들은 트럼프에 대한 불만을 이번 대선에서 제대로 터뜨렸다. 매케인 부인의 바이든 지지 선언, 매케인 캠프 출신 전략가들이 벌인 트럼프 낙선운동도 온건 공화당원들의 표심을 흔들었다.

▷매케인과 트럼프는 같은 보수의 깃발 아래 묶기가 곤란할 만큼 극과 극이다. 매케인은 국가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고, 보수의 가치와 품격을 중시했다. 반면 트럼프는 중하층 노동자계층의 표심에 영합하려 하고 변칙적이고 돌발적인 언행으로 국민의 편을 갈라 목적을 달성하는 ‘선동가’에 가까웠다. 애리조나 패배는 원조 보수의 비판에 발끈하며 원색적으로 대응한 자업자득인 것이다. 죽은 매케인이 산 트럼프를 쫓아낸 셈이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
#매케인#공화당#상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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