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한일 최초 공모주 청약…조선서 쪽박 찬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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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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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2가에 있던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사.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기관으로, 1926년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을 받았다. 광복 이후 신한공사, 내무부 등이 사용하다 1972년 철거된 뒤 이 자리에 현재 하나금융그룹 명동지사가 된 한국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서울 을지로2가에 있던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사.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기관으로, 1926년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을 받았다. 광복 이후 신한공사, 내무부 등이 사용하다 1972년 철거된 뒤 이 자리에 현재 하나금융그룹 명동지사가 된 한국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유럽 열강들은 17세기 초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세워 독점적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로부터 300여 년 뒤인 1908년 일본은 동인도회사를 모방해 조선에 동양척식회사(동척)를 설립하죠.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더니 못된 것부터 배운 모양입니다.

‘조선 인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명분으로 출범한 동척은 형식상 한일 양국이 함께 세운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였습니다. 자본금 1000만 원을 모으려고 50원짜리 주식 20만 주를 발행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통감부는 대한제국 정부에 6만 주를 인수하라고 강요했고, 돈 없는 한국정부는 대신 땅 1만7714정보(175㎢)를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논이 70%나 됐습니다. 양국 왕실에서 얼마간 주식을 인수하고 남은 13만여 주는 두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주 청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묘합니다. 일본에서는 광적인 인기를 모아 35대 1의 경쟁률을 보였지만, 조선에선 응모 주수가 목표의 2%에도 못 미쳤습니다. 이미 이때부터 동척의 실체를 꿰뚫어봤던 건 아닐까요?

동척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으로 날개를 답니다. 우리 농민들은 대대손손 부치던 논밭이 자기 땅인 줄만 알았지 소유권이란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문서로 소유권을 증명할 수 없는 땅을 전부 동척에 넘겼고, 조선 제일의 땅 부자가 된 동척은 이주한 일본 ‘내지인’들에게 이 전답을 불하했습니다. 땅을 빼앗긴 조선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신히 소작을 얻어도 5할이 넘도록 치솟는 소작료와 지주, 농감(農監)의 횡포에 못 견디고 만주 등지로 건너갔죠.



동아일보는 기사뿐 아니라 1면 독자투고 만평 ‘동아만화’를 통해서도 동척의 만행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①1923년 관동대지진 때 
헐벗은 조선 이재민 동포에게 담요를 주면서, 뒤로는 추수한 쌀을 가차 없이 착취하는 표리부동한 동척을 묘사했다. ②기아 상태에 
놓인 황해도 봉산군의 조선인 소작인들과, 이들로부터 빼앗은 집과 옷, 소작료를 깔고 앉은 배부른 동척을 대비시켰다. ③자기 마음에
 드는 농민에게만 소작권을 주는 농감의 횡포를 그린 만평. 지주를 대신해 소작인을 관리 감독했던 농감도 많은 곳에서 원성의 대상이
 됐다.
동아일보는 기사뿐 아니라 1면 독자투고 만평 ‘동아만화’를 통해서도 동척의 만행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①1923년 관동대지진 때 헐벗은 조선 이재민 동포에게 담요를 주면서, 뒤로는 추수한 쌀을 가차 없이 착취하는 표리부동한 동척을 묘사했다. ②기아 상태에 놓인 황해도 봉산군의 조선인 소작인들과, 이들로부터 빼앗은 집과 옷, 소작료를 깔고 앉은 배부른 동척을 대비시켰다. ③자기 마음에 드는 농민에게만 소작권을 주는 농감의 횡포를 그린 만평. 지주를 대신해 소작인을 관리 감독했던 농감도 많은 곳에서 원성의 대상이 됐다.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동척의 수탈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민중의 항거를 낱낱이 보도했습니다. 그러다 1922년 3월 초 동척이 방만 경영으로 돌려받지 못하게 된 대출금이 수천만 원에 이른다는 보도가 일본에서 나오자 3월 13일자 사설 ‘동척 폐지를 논하노라’를 통해 처음으로 동척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사설은 동척의 과다한 결손이나 회사채 발행은 접어두더라도 우리의 비옥한 전답을 이주 일본인에게 넘기는 것이 과연 조선 인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정책인지 묻고, 제국주의와 침략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사람의 취할 바가 아니라고 꾸짖었습니다.

1922년 4월에는 전남 강진군의 한 농민이 이주 일본인에게 땅을 뺏긴 뒤 그를 찾아가 그동안 논을 일구는 데 들어간 비용이라도 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몽둥이로 얻어맞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같은 달 24일자 사설 ‘동척 폐지를 재론하노라’를 실어 ‘조선 인민의 행복을 증진하려면 차별대우를 철폐해야 하고, 차별대우를 철폐하려면 조선인을 내쫓는 동척을 폐지해야 한다’고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 해 황해도 지역의 수재로 재령평야 3000정보가 물에 잠기고 1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동척이 무너진 둑을 개축하는 데 조선 소작인들을 반강제로 동원하자 동아일보는 ‘횡설수설’에서 ‘땅 뺏고 노동까지 빼앗아서는 동척이 아니라 도척(盜¤)’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동척의 횡포가 계속되자 1922년 10월부터는 논조가 달라집니다. 10월 24일자 사설 은 ‘어찌 일본인만 살기 위해 토지를 획득하고, 조선인은 죽기 위해 지옥에 빠지겠는가’라며 조선 소작인들에게 생존과 생명을 위해 쟁투를 선포하자고 했습니다. 사흘 뒤 ‘이천만 형제에게 격(檄)하노라’ 제하의 사설은 ‘조선 소작인은 쫓겨나는 것은 그들이 조선인이기 때문이므로, 같은 조선인인 이천만 민중이 힘을 모아 생존의 쟁투를 개시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같은 보도는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소작쟁의에 힘을 더하고, 1926년 말 나석주 의사의 동척 폭탄투척 의거로도 이어지는 작은 밀알이 됐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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