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레이더 갈등’ 계기로 집필, 재일교포 모금 등으로 비용 마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서 일장기 가리려 월계수 바싹 안아”

원로 스포츠학자로 최근 ‘평전 손기정’을 출간한 데라시마 젠이치(寺島善一) 메이지(明治)대 명예교수(73)는 16일 이같이 고(故) 손기정 선생(1912∼2002)을 추모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 선생을 수십 년간 연구해왔다. 자서전, 사진집을 제외한 손 선생 평전이 나온 것은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처음이다.
데라시마 교수가 펜을 잡은 것은 지난해 12월 말, ‘레이더 갈등’으로 한일 간 공방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는 “아베 신조 정부 핵심 세력들이 한국에 싸움을 거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관계가 악화된 채 내년 2020 도쿄 올림픽을 맞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스포츠 평화 정신으로 한일이 우호를 다져야 한다’는 손 선생의 말이 떠올랐고 곧바로 자료를 모아 원고를 썼다.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과 관련해 데라시마 교수는 “손 선생께서 ‘한국인이 우승했는데 왜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나오나 하는 부끄러움에 받은 월계수를 가슴에 최대한 끌어당긴 채 일장기를 가렸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데라시마 교수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언급하며 “손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박혀 있는 것을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손 선생은 한일 간의 우호 관계를 강조했다. 개회식 당시 맨 앞에 서 있던 손 선생에게 한 일본 선수가 “너는 조선인이니까 뒤로 가”라고 하자 당시 육상 선수단 주장인 오시마 겐키치(大島鎌吉) 선수가 “올림픽 중에는 차별하지 말라”며 손 선생을 옹호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이어갔다.
첫 평전에 대해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학술적인 연구가 미비했던 우리나라에 과제를 던졌다”며 “한국 현대사 속 활약상 등 우리만의 시각을 담은 평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전 출간에 들어간 비용 1000만 원은 재일동포, 민단의 모금으로 마련했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외형도 한일 교류를 실천한 셈이다. ‘하늘에 있는 손 선생이 이 평전을 보면 뭐라고 할 것으로 보나’라고 묻자 데라시마 교수는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주고받으며 모두가 친구가 되는 그런 스포츠정신으로 한일 관계를 해결하라고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책 표지에는 ‘스포츠는 국경을 넘어 마음을 이어준다’라는 글귀가 한글로 적혀 있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