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원수]부고도 남기지 않고 떠난 ‘이영구 판사’를 다시 부른 법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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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사회부 차장
정원수 사회부 차장
‘사건 76 고합 186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1층 법원전시관에 있는 낡은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6년 11월 타자기로 한 글자씩 눌러쓴 7장 분량의 판결문은 42년이라는 세월의 무게에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맨 마지막 장 ‘판사 이영구’라는 문구 위 이 판사의 자필 서명은 선명했다.

그 판결이 있었던 그해 4월.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수업시간에 “후진국일수록 1인 정권이 오래간다”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다”고 말했다. 당시 정보기관에 다니던 한 학생의 아버지가 신고해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교사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그러나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역사적 사실을 날조했거나 왜곡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 221명에 대한 선고 중 유일한 무죄였다. “정권의 방어체제가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고, 이듬해 1월 지방으로 좌천된 이 판사는 결국 법복을 벗었다.

변호사가 된 뒤 그는 “내가 정치적 색채를 보이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재판하고 있는 법관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이른바 ‘시국사건’ 변호를 거절했다. 40년 가까이 변호사로 조용히 지내던 그는 췌장암 판정 뒤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11월 18일 숨졌다. 그의 가족은 부고를 내지 않았다. 장례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모여 조용히 치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요즘 이 판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올해 9월 13일 대법원의 ‘사법 7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사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이달 16일에는 이 판사의 1주기 추모식이 대법원에서 열렸다. 법원전시관에선 ‘암흑의 시대, 꽃이 된 법관’이라는 주제로 이 판사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이 판사는 사실 대중뿐 아니라 동료 판사들에게도 낯설다. 그의 사연이 법원 역사에 공식 기록된 건 1995년이다. 당시 근대 사법 100주년을 기념해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에 이 판사의 이름이 나온다. 1334쪽 분량의 법원사 701쪽에 이 판사의 긴급조치 판결 일화가 16줄로 정리돼 있다. 오욕의 사법부 역사에서 그나마 체면을 살린 판사 중 한 명으로 소개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판사의 판결을 보도하며 “몇몇 원로 법조인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옛 얘기들이 뒤늦게 정사(正史)로 기록돼 햇빛을 보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판사와 공군 법무관을 함께한 윤관 당시 대법원장 등의 기억이 이 판사 기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법원 내부에선 보고 있다. 윤 전 대법원장은 최근 이 판사의 추모공원에 들렀다고 한다.

이 판사의 스토리는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이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책에 다시 나온다. 국가 권력이 사법권을 침해한 대표 사례로 꼽혔는데, 이번에는 3쪽 분량으로 판결 전후 사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11년 만에 이 판사에게 국민훈장이 추서된 것이다.

법원 내부에선 ‘위기의 사법부가 이 판사를 다시 불렀다’고 평가한다. 재판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이어 현직 판사 탄핵 논의가 오가는 현실이 그와 같은 판사를 다시 찾게 했다는 것이다. 유족은 “소신껏 일한 대가로 훈장을 받은 것이 후배 법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판사는 평소 가족들에게 “나는 법과 양심에 따른 책무를 다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인의 뜻대로 판사의 기본과 판결의 원칙부터 바로 세우는 사법부로 거듭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이영구 판사#사법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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