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최영훈]大國手

최영훈 논설위원 입력 2018-11-07 03:00수정 2018-11-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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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바둑판을 메고 세상에 뛰어든 22세 청년이 있었다. 일본 바둑계의 고수 기타니 미노루의 내제자로 들어가 18세에 조선인 최초의 일본 프로기사가 된 그를 당할 사람은 국내에 없었다. 제1회 바둑의 날 기념식에서 대국수(大國手) 메달을 헌정받은 고 조남철 9단이다. 동아일보가 1956년 창설한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전에서 초대 국수에 오른 뒤 9연패를 했다. “바둑 두는 사람 어딜 갔나? 천하의 조남철이 와도 안 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중국에서 국수(國手)란 각 분야에서 특출한 대표적 인물에게 붙여졌으나 한국에선 옛날부터 바둑 최고수를 지칭했다. 대만에서는 고 우칭위안(吳淸源)이 최초로 대국수 칭호를 받은 바 있다. 조 9단과 함께 국수 메달을 받은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9단은 일본에서 활약한 조치훈 9단을 제외하면 차례로 국수전을 석권한 사람들이다. 조남철 9단의 10연패를 저지한 김인 9단은 6연패, 조훈현 9단은 10연패의 위업을 세웠다. 조훈현 9단의 내제자인 이창호 9단은 세계대회 21회 우승으로 청출어람의 면모를 보였다.

▷국회의원이 된 조훈현 9단은 불세출의 천재 기사였다. 9세 입단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세계 최연소 기록이다. 입신(入神)이라는 9단에도 최초로 올랐다. 대국수 조남철 9단은 김인 9단에 이어 1983년 특별승단 형식으로 9단에 올랐다. 1963년 8단에 오른 지 20년 만이었다. 승단대회에 출전하지 않고 바둑 보급에 힘썼기 때문이다.

▷조남철 9단은 6·25전란 때 생필품 대신 바둑 기보를 챙겨갈 정도로 바둑 사랑이 깊었다. 전문기사·입단 및 승단 제도 등을 만들어 바둑 현대화에도 공이 컸다. ‘위기개론’이라는 최초의 바둑책을 펴내고 바둑 용어를 ‘빵때림’ ‘끝내기’와 같이 우리말로 바꾸는 데도 힘썼다. ‘바둑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기도보국(棋道報國)이 좌우명이었다. 현대 바둑의 기틀을 세운 조 9단은 바둑의 대중화와 국제화를 내다본 선각자였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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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조남철 9단#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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