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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IT/의학

30억 DNA 중 돌연변이 1개만 골라 싹둑… 난치병 정복 첫발

입력 2017-12-23 03:00업데이트 2017-12-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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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0.00000003%의 확률을 맞히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진화
크리스퍼는 일종의 DNA 교정 도구다. 유전자 가운데 고쳐야 할 부분을 정확히 골라 끊어준다. 끊어진 자리에 새 DNA를 끼워 넣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질병을 일으키는 DNA 분자를 딱 하나 골라 다른 DNA로 변형시키는 신기술도 나왔다. 미국국립보건원 국립휴먼게놈연구소
가오쉐 미국 하버드대 화학 및 화학생물학과 연구원은 올해 내내 실험용 마우스(흰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열중해 있었다. 이 쥐의 이름은 베토벤. 천재 작곡가 이름과 같았다. 이 쥐에게 음악적 재능이 탁월해서 붙인 이름은 아니다. 사실 이름을 지은 것도 가오 박사가 아니다. 2002년, 처음 이 쥐를 탄생시키고 이름을 붙인 이스라엘 과학자들은 한 가지 특성이 보통 쥐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18, 19세기에 활동한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20대 후반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다 44세에 거의 청력을 잃었다. 그가 청력을 잃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후천적인 병의 후유증 또는 유전적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과학자들은 둘 가운데 유전적 요인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쥐를 이용한 실험 끝에 청력의 손상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발견했다. Tmc1이라는 유전자가 정상과 다를 경우(이 유전자에 변이가 있을 경우), 귀 안쪽의 달팽이관에 있는 청각 신호 생성 세포(유모세포)에 일종의 노폐물 단백질이 만들어져 쌓인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노폐물이 쌓이면 유모세포가 죽으면서 청력이 서서히 약해지고, 10∼15년 뒤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지만 베토벤이 청력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과 비슷하다.

선천성 난청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과학자들은 그동안 베토벤 마우스를 이용해 해결책을 연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Tmc1 유전자에서 이상이 있는 부위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간단했다. DNA는 A, T, G, C 네 가지 분자로 된 일종의 언어다. Tmc1 역시 그런 DNA의 일부다. Tmc1 유전자의 변이는, 여기에 단 한 글자가 중간에 잘못 끼어들어 갈 경우 발생한다. 이 말은, 이 DNA 하나만 떼어내면 난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DNA는 그렇게 쉽게 떼어내거나 바꿀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일단 무척 작다. 흔히 이중나선으로 묘사되는 DNA 한 가닥의 굵기는 머리카락의 10만 분의 1 정도인 1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m)로, 인간이 만든 어떤 도구도 이렇게 작은 DNA를 직접 찾아 끊을 수 없다. 또 DNA 자체가 생명의 정보를 간직하고 있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이다 보니 무엇보다 변형에 극도로 저항하는 성질이 있었다. 철사처럼 튼튼하고 고무줄처럼 질긴 생체 고분자 물질이 바로 DNA다.

올해 유전자 교정 도구 ‘크리스퍼’ 분야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이룬 데이비드 류 미국 하버드대 교수. 정밀한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퍼를 한 단계 더 개선해 분자 하나하나를 직접 수정할 수 있는 ‘유전자 편집기’를 개발했다.
가오 박사에게는 한 가지 무기가 있었다. 바로 최근 2, 3년 사이에 생명과학계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유전자 교정 기술, ‘크리스퍼’였다. 흔히 유전자 가위로 비유되는 이 기술은 가늘면서도 질긴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높은 정확도로 잘라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30억 개 DNA에서 한 개의 DNA를 찾는 데, 목표 한 개를 포함해 평균 90배수까지 후보를 추릴 수 있을 정도의 정확도다. 한 명의 범인을 찾는 수사에서 90명의 용의자나 찾는다면 꽤 한심한 능력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수사 대상이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30억 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0.000003%의 확률을 맞히는 놀라운 정확도다. 가오 박사는 쥐의 귀에 크리스퍼 분자를 집어넣어 직접 난청 유발 유전자를 잘라내는 방법으로 난청을 고친 결과를 21일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난치성 병을 직접 고친 이 사례는 크리스퍼 기술이 올해 주도하고 있는 혁신의 한 단면이다. 성공적인 질병 치료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김정훈 서울대 병원 교수 팀과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 팀이 크리스퍼를 캡슐로 감싸 눈에 넣어 노인성 황반변성을 치료하고 실명을 예방하는 데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노인성 황반변성은 혈관이 없어야 할 황반에 혈관이 자라면서 시야를 가려 실명을 유발하는 병으로, 전체 실명 원인의 5%를 차지한다.

올해 8월 김진수 단장은 체세포 핵치환 기술의 대가인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교수 팀과 함께 인간 배아에 크리스퍼를 적용해 선천적 심장 질환인 비후성 심근증을 치료하는 데 처음 성공했다. 당시 김 교수는 “인간 배아에서 크리스퍼로 돌연변이를 교정해 다음 세대로 유전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혁신은 크리스퍼 기술 자체의 진보다. 특히 정확도가 더욱 높아졌다. 크리스퍼는 크게 두 가지 구성 요소로 이뤄진 생체 분자 기계다. 원하는 DNA를 찾을 수 있게 정보를 담고 있는 부위가 한 부분이고, DNA를 실제로 잘라 내는 일종의 절단효소가 한 부분이다. 가장 널리 연구되고 쓰이고 있는 크리스퍼는 절단효소로 ‘캐스9’를 쓰는 크리스퍼-캐스9이다.

2015년, 장펑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은 캐스9보다 정확성이 높은 Cpf1이라는 효소를 이용하는 새로운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pf1’을 개발했다. 김진수 단장 팀은 작년 6월 신형 크리스퍼-Cpf1의 정확성을 기존 크리스퍼-캐스9와 비교하는 연구를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크리스퍼가 DNA 30억 쌍 중 오직 목표로 정한 단 한 곳만 자를 정도로 정확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0.00000003%의 확률이다. 또 김 단장 팀은 이 기술로 생쥐의 털 색깔을 바꾸는 동물실험에 성공하기도 했다.

아예 전혀 새로운 원리로 작동하는 차세대 유전자 교정 기술도 등장했다. ‘유전자 편집기(gene edito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 기술은 작년 불완전한 모습으로 처음 선을 보인 뒤 올해 10월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재등장해 생명과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유전자 편집기를 고안해 낸 데이비드 류 하버드대 교수는 15일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에 의해 올해의 과학 인물로 선정됐고, 유전자 편집기도 22일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의해 올해의 10대 과학 성과로 뽑혔다.

유전자 편집기는 DNA 한 지점을 대상으로 크리스퍼보다 더 정교한 교정을 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A, T, G, C 네 글자로 된 언어(DNA)에서 수정하고 싶은 글자 단 하나만 골라 바로 바꿔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퍼-캐스9나 크리스퍼-Cpf1은 목표 유전자를 찾아 DNA 한 쌍(두 가닥)을 다 싹둑 자른 뒤에 새 DNA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교정을 한다. 이 때문에 조금은 정교하지 않은 방식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유전자 편집기는 다르다. 교정을 원하는 글자 딱 한 곳을 정확히 찾아 화학적인 방법으로 그것만 바꿔치기해 정밀도가 높다. 류 교수는 10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이전 크리스퍼는 큰 칼처럼 둔하고, 유전자 편집기는 정밀 화학 시술처럼 예리하다”고 비유했다. 김진수 단장의 실험에 따르면, 원치 않는 DNA를 잘못 자를 오작동 확률이 크리스퍼-캐스9의 3분의 1 이하로 적어 정확도도 높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유전자 하나에 변이가 일어나 생기는 유전질환은 1만 개가 넘는다. 혈우병, 겸상적혈구빈혈증, 헌팅턴병 등이 그 예다. 유전자 편집기는 이들 병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교정 기술이 어디까지 더 발전할지는 아직 상상하기 힘들다. 올 한 해 이룬 성취가 몹시 크지만, 젊은 기술로서 여전히 앞으로 혁신할 면이 많기 때문이다. 활용 범위도 훨씬 넓어질 것이다. 질병 치료 외에 식량 증산을 위해 작물을 개량하는 데 적용하는 연구도 중국과 유럽 등에서 활발하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기자 ashill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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