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따라갔더니 호텔방 육아독박” 할머니들의 한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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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여행후 ‘손주병’ 호소 늘어

“3일 내내 호텔방에만 있었어요. 저녁만 되면 은근슬쩍 손자를 맡기고 둘만 놀러 나가서 어찌나 서럽던지….”

자녀 부부와 괌으로 3박 4일 일정의 휴가를 다녀온 노모 씨(69·여)는 귀국 다음 날인 4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가정문제상담소를 찾았다. 노 씨는 “친구들은 사위가 해외여행에 모시고 간다며 ‘팔자 좋다’고 했지만 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한숨을 쉬었다. “손주 돌보느라 고생하신다”는 사위의 말에 들뜬 마음으로 휴가 길에 올랐지만 양육 장소가 외국 호텔방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노 씨는 “온종일 손주 돌보는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 휴가지 ‘독박’ 육아에 ‘손주병’까지

‘황혼 육아’로 신음하는 부모를 모시고 3040 맞벌이 부부들이 효도관광을 겸한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하지만 휴가지에서 육아를 도맡은 조부모들이 ‘손주병’을 호소하며 상담소를 찾고 있다. 손주병은 관절염이나 우울증 등 손주를 무리하게 돌보다 앓게 되는 신체적, 정신적 질환을 뜻하는 신조어다.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장은 7일 “휴가를 다녀와서 손주병이 생기거나 악화됐다는 50, 60대 여성이 평소보다 20% 이상 늘어났다”고 말했다.

지난달 아들 부부와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大阪)를 다녀온 한모 씨(65·여)는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세 살배기 손녀 때문에 여행 내내 허리통증에 시달렸다. 낯선 환경에 불안해한 손녀가 할머니에게만 안기려 한 것이다. 한 씨는 “손녀가 다리 아프다고 칭얼댈 때마다 아들이 ‘엄마, 빨리요(안아 주세요)’ 하는데 무척 얄미웠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사는 이모 씨(66·여)는 아들 부부와 함께한 사이판 여행 3박 4일 중 이틀 동안 호텔에서 4세 손자와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아들 부부가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 버린 탓이다. 이 씨는 “텅 빈 호텔방에서 손자를 재우다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의 김모 씨(67·여)는 귀국길 공항 면세점에서 딸 부부로부터 명품 가방을 선물받았다. 김 씨는 “여행 가서 자기 자식 돌보느라 고생만 시켜 미안했는지 선물을 챙겨주긴 했지만 정작 필요한 건 하루 이틀이라도 푹 쉴 수 있는 여유”라고 말했다.

○ 자녀 부부싸움 할까 휴가 때도 ‘헌신’

자녀들은 자신의 아이를 평소 길러준 부모에게 미안함을 느껴 휴가를 같이 가자고 한다. 하지만 조부모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응한다고 한다. 자칫 ‘휴가 동행’ 요청을 거절하면 자녀 부부가 불화를 겪게 될까 봐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특히 외가에서 주로 손주를 양육하는 경우 친가 쪽 조부모들은 부채의식과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독박 육아’를 각오하고 휴가에 함께한다. 아들 부부와 필리핀 세부 여행을 다녀온 박모 씨(66·여)는 “아들이 ‘평소 처가에서 애 봐준다고 고생이 많은데 우리도 성의 표시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직장 다니는 집사람이 쉴 수 있게 휴가지 가서 아이 좀 봐 달라’고 사정하더라”고 말했다. 외조부모들은 딸이 휴가 때라도 편히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따라 나선다.

김 소장은 “조부모가 낯선 여행지에서 특정 장소에만 머물며 육아를 도맡으면 소외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며 “자녀 부부와 함께 휴가를 갈 경우 양육 분담을 어떻게 할지 미리 정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휴가#육아#손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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