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독립군’ 북간도 한인들의 생활사]습지 갈대밭 갈아엎고 ‘쌀문화 혁명’ 일으켜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 입력 2017-03-03 03:00수정 2017-03-0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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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황무지서 일군 벼농사 기적
수로 개설해 밭을 논으로… 水田보급… 中동북부 食문화 바꿔
농무계는 항일운동 거점 되기도
북간도 육도구(六道溝)의 대형 수차. 1908년 모습으로 일제 통감부 파출소가 낸 ‘간도사진첩’에 나오며, 물레방아의 일부로 보인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요즘 중국의 동북3성에는 흑룡강성 오상입쌀, 길림 만창입쌀, 연변입쌀 등 ‘입쌀 브랜드’ 경쟁이 치열하다. 생산자는 “누가 뭐라 해도 쌀은 우리 민족의 주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조선족이고, 그 시작점에 월강(越江)한 한인이 있다.

발해 때 이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뒤에는 완전히 단절됐다. 동북3성의 작물은 고량, 조, 감자 등 밭농사 중심이었고, 논농사는 지을 줄 몰랐다. 수전(水田)이라고 부르는 논농사가 최초로 성공한 건 1875년 통화(通化·현 지린성 퉁화시)에서다. 북간도에서는 1906년 연길현 용지향 대교동(大敎洞·용정과 명동촌 길목)에서 한인 14명이 공동으로 논농사에 성공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김약연 선생(1868∼1942)과 명동촌 개척의 주역인 김하규 선생(1862∼1942)의 사촌형 김형규의 이름을 거명한다.

동북3성은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2∼6도 높고, 강우량도 50∼600mm로 양질의 쌀 생산이 가능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만주인은 한전(旱田·밭) 작물만 생산하고 관개의 이익을 모른다. 우리들이 한전 곡물만 먹어야 되니 풍토가 너무 달라 병에 걸리기 쉬워 황지를 수매하여 벼농사를 한다”고 말했다.

“만주 땅 넓은 들에/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있고/벼가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호미와 바가지밖에 더 있나/호미로 파고 바가지에 담아/만주벌 거친 땅에 벼씨 뿌리여/우리네 살림을 이룩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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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래에서 보듯 논농사는 이 지역에서 한인의 특허 같은 기술이었다. 어려움도 많았다. 한인들은 황무지였던 습지의 갈대밭을 갈아엎어 논을 만들고 수로를 개설해 하천의 물을 끌어들였다. 한인들은 중국의 겨리(짐승 두 마리가 끄는 큰 쟁기)를 비롯한 농기구들이 체격에 맞지 않자 농기구를 직접 만들었다. 하천의 물을 끌어들이는 무자위(水車·수차)를 설치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수로 개설과 수차 설치는 하류의 물 사용이나 중국인들의 밭에 영향을 주는 등 분쟁의 소지가 있었다. 대륙 침략의 구실을 만들려는 일제의 모략으로 한중 농민이 충돌하는 만보산사건(1931년 7월)이 벌어지기도 했다.

쌀은 동북 지역의 경제에 효과를 낼 정도여서 중국 당국도 한인을 적극적으로 유치했고, 벼농사는 점점 확대됐다. 수전은 한인의 상징이 됐다. 1921년 용정의 동흥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논농사 기술을 정식 과목으로 가르쳤다. 한인들은 수리조합을 만들고 농무계(農務契)를 조직했는데, 농무계는 항일독립운동 조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발이 시려 논에 들어가 파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벼농사의 시작은 어려웠지만 그 결과는 동북 지역의 주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중국 노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수갱자(水粳子·조선 쌀)를 심었기에 맛있는 쌀을 주식으로 먹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고자 월강한 한인들이 동북3성의 식생활을 바꾼 것이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

#쌀문화 혁명#북간도#입쌀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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