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신라왕릉의 석인(石人)상’ 논문에서 38기의 신라왕릉 중 석인상을 갖춘 괘릉과 성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석인상과 석사자, 십이지상, 화표석 등을 두루 갖춘 괘릉에서 신라왕릉 중 처음으로 무인상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신라 하대 석학이던 최치원이 쓴 ‘숭복사 비명(碑銘)’이 주목된다. 경문왕이 곡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경위를 적은 비석이다. 괘릉은 곡사가 옮겨간 뒤 빈자리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괘릉 무인상의 모티브는 무엇인가. 임 교수는 9세기 전반 서역인들의 신라 입국이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델로 석인상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당시 세계 제국이던 당나라가 서역인들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단속했으며, 신라의 국내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괘릉 무인상의 얼굴이 경주 서악동 고분 문비(門裨)석의 금강역사상과 비슷한 게 오히려 눈길을 끈다. 무인상에서 머리에 두른 띠나 허리에 찬 둥근 주머니와 같은 복식은 서역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 복식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라왕릉 십이지상이 입고 있는 갑옷이 사천왕상과 흡사하고 사자상도 불교 사자상을 닮는 등 불교 조각의 광범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임 교수는 “무인상은 사찰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하는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순덕의 도발]안철수는 경선하지 않는다
교수가 된 탈북병 “총은 버려도 옷은 못벗는다 버텼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김형석 칼럼]국민의 신뢰와 희망에 못미치는 야당
文 국정지지율 38% 2주째 최저치…모든 연령대서 “부동산정책 실패”
홍준표 “朴·MB는 희생양…사면 아닌 ‘석방’ 요구해야”
“제 강인함은 한국인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죠”
Copyright by dongA.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