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한국인이 ‘휘게’에 꽂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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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11월 4일 14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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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의 TREND INSIGHT



‘정’ 이나 ‘이웃사촌’은 참 정겨운 말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주고받는 건 상호부조이자 거래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끈끈한 연대의식과 ‘우리가 남이가’ 같은 정서가 담겼다. ‘한’을 가슴에 품은 원한이란 의미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효도’를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 주고받은 관계로 해석할 수 없듯이 어떤 말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진 문화와 역사가 깊이 담겼다.

아무리 번역기능이 발달해도 단어 해석만으로는 전부를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덴마크의 휘게(Hygge) 라는 단어도 그렇다. 발음은 Hoo-guh, 또는 Hue-gah로 후거 혹은 후가, 휘게 등으로 읽는데, 사실 덴마크어의 정확한 발음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발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언어로는 이 말을 정확히 번역하기 어렵다. 휘게는 덴마크어로 ‘안락하고 아늑한 상태’를 뜻하는데,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고 느긋하게 함께 어울리는 편안한 친교활동을 말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것을 즐기는 따뜻한 분위기, 일상의 소박함을 즐겁게 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유난히 길고 어두운 겨울을 보내는 덴마크 사람들에게 가족, 친구와 함께 하는 일상과 사회적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휘게는 노르웨이에서도 쓰는 말이다. 북유럽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가지는 삶의 태도가 바로 휘게다.

스웨덴에는 피카(FIKA) 문화가 있다. 피카는 커피를 뜻하는 단어로 커피에 빵과 과자를 곁들여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쉼표 같은 문화다. 스웨덴의 거의 모든 사무실에는 피카룸이 있을 정도인데, 직원들이 가장 만나기 쉬운 사무실 중앙에 주로 있다. 오전과 오후 각 한 번씩 피카 타임을 가지는 직장이 많고,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우리도 점심 후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경우가 있지만, 피카는 커피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일상에서 여유를 누리며 사람에 대한 애정을 키운다.

북유럽 국가들은 1인 가구 비중이 높다. 대개 40% 선을 넘는데, 전 세계에서 1인 가구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1인 가구가 많아 개인주의가 팽배한 듯 보이지만, 이들은 ‘따로, 그리고 같이’라는 균형을 잘 맞춘다. 복지강국은 버는 돈의 절반을 세금으로 낼 정도로 세금을 많이 낸다. ‘나 혼자 잘 살자’ 보다 ‘함께 잘 살자’를 선택한 국가에서는 공동체의 사람들과 따뜻한 친교를 나누는 집단 문화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계속 유지돼야 복지강국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유지될 수 있다.

스웨덴에는 ‘라곰(lagom)’이라는 말도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뜻한다. 스웨덴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자 라이프스타일인데 가장 어려운 게 ‘적당히’ 아닌가. 이들은 그 말을 삶의 중요 화두로 삼는다. 일을 하든 뭘 하든 그들은 라곰이란 말을 잘 쓴다. 너무 빠르거나 앞서가지도, 너무 욕심내지도 않고 적당히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자는 것이다. 인간적인 삶의 화두면서,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휘게나 라곰 같은 매력적인 단어를 한국에서도 놓칠 리 없다. 이미 휘게는 북유럽 라이프스타일 제품이나 외식 브랜드로 쓰이고, 라곰은 뷰티 브랜드로 쓰인다. 종교나 힐링업계에서도 이런 단어를 노린다. 2017년에는 전 방위로 많이 쓰일 것이다. 그동안 힐링, 웰빙, 로하스 같은 단어를 모두 과하게 써왔다. 그 때문에 그 말들이 가진 효과는 크게 떨어졌다. 이젠 마케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오면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늘 사람들은 새로운 단어를 찾는다.

마케팅에서 활용될 단어는 사람들에게 낯설면서 흥미로워야 한다. 과거엔 영어나 프랑스어를 브랜드로 많이 썼다. 한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어감과 의미를 담은 언어로 이젠 북유럽 언어가 선호된다. 덴마크어나 스웨덴어는 낯설지만, 북유럽이 가진 특유의 매력이 있어서 흥미를 끌기에 적당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상위권에 북유럽 국가들이 포진됐고, 삶의 질이나 복지, 1인당 소득이 높은 순위에서도 북유럽은 빠지지 않는다. 노동시간이 짧은 순위에서도, 부정부패가 적고 투명한 국가 순위에서도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이제 한국인에게도 그들이 동경되기 시작했다. 북유럽 스타일,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라며 북유럽의 가구, 조명, 디자인 제품이 주목을 받고, 북유럽의 복지제도와 교육제도에도 관심이 커졌다. 북유럽 국가에 있는 글로벌 브랜드들이 속속 한국에 들어왔고, 여행지이자 이민 가고 싶은 곳으로도 북미나 서유럽과 다른 새로운 매력으로 관심을 받게 됐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촉발된 킨포크 라이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확산된 단샤리(斷捨離, 미니멀 라이프)는 후거와 맥을 같이 한다. 더는 과거와 같은 물질 풍요를 누릴 수도 없고, 그걸 지향하는 삶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린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물질이 아닌 사람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킨포크도 받아들였고, 미니멀 라이프도 받아들였다. 이제 후거까지 받아들일 듯하다. 이는 우리에게 닥친 불황의 골이 꽤 깊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위기의 시대, 결국 한국인에게는 사람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김용섭은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휘게#문화#라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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