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33>그때 그 순간의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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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브램리, ‘희망 없는 새벽’.
프랭크 브램리, ‘희망 없는 새벽’.
뉴린은 영국 서쪽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아름다운 화강암 해변으로 이름 높은 마을에 미술가들이 모여든 것은 1880년대 초였어요. 이후 예술적 뜻을 같이하며 역동적인 어촌의 삶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미술가 그룹도 생겼어요.

프랭크 브램리(1857∼1915)는 뉴린 화파의 초창기 멤버였습니다. 1884년부터 11년을 이곳에 머물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어요. 특히 화가는 바다에서 생선을 얻는 삶의 긴장을 정교한 실내 풍경으로 구현해 냈지요. ‘희망 없는 새벽’은 이 시기 대표작입니다.

실의에 찬 여인들 뒤로 절망의 동이 트고 있습니다. 별빛 없는 밤을 지나 새날이 밝았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림 속 허름한 창 너머 성난 바다가 문제인 것 같군요. 1888년 전시 당시 존 러스킨이 ‘파도가 쉬지 않고 출렁이고 바람이 아우성쳐 불신과 마음의 병’을 일으킨다고 설명한 바로 그 바다입니다. 그림 주제는 뉴린 화파를 주도했던 월터 랭글리가 화가보다 6년 먼저 다룬 것이었지요. 바다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세 명의 어부’를 노래한 찰스 킹슬리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지요.

같은 주제이지만 그림의 구성과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화가는 안타까운 사건을 충실히 담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비극이 야기한 감정 상태를 섬세하게 전달하고자 했거든요. 그림 속 남편을 잃은 여인이 참담함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군요. 그런 여인 곁을 노인이 지키고 있습니다. 불행한 상황을 공유하며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는 중이군요. 마룻바닥이 삐걱거리고, 남루한 가재도구가 뒹구는 방 안 식탁의 빈자리는 이제 어부 아내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기력을 다한 여인이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희망이 끊긴 새벽, 함께 있는 누군가가 유일한 희망처럼 여겨지는 걸까요. 그림 속 노인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낯선 도시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던 길이었지요. 한 청년이 무거운 짐 때문에 계단 내려가기를 망설이는 할머니를 돕고 있더군요. “이런 사람들이 있어 나 같은 사람이 살지.” 청년을 향한 할머니의 커다란 감사 인사가 나를 책망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둘러 여기저기 안부 문자를 보냈습니다. 체념으로 뒤척였던 수많은 불면의 밤, 그림 속 노인처럼 내게 선뜻 무릎을 내준 사람들이 참 많기도 했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프랭크 브램리#희망 없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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