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의 오늘과 내일]해도 너무한 대한민국의 민낯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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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정책사회부장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큰딸 조기유학 포기한 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몰라요. 선배는 꼭 일찍 외국에 보내세요.” 어제 제헌절에 한 후배가 이 나라 교육은 회복 불가능하게 미쳐버렸다며 해준 조언이다. 중고교생들은 명문대에만 들어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조차 없으면 그 많은 돈과 시간, 고통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슬프지만 그 착각은 잠시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짜리 입시 컨설팅을 받아 대학에 들어갔는데 입학하자마자 시간당 수십만 원짜리 취업 컨설팅을 받는 학생이 부지기수다.

이런 청년들이 꿈꾸는 미래상이 공직자다. 신분 보장은 당연하고, 중앙 부처의 일부 공무원은 산하기관들을 옮겨 다니며 풍족한 말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일반인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특혜를 누린 공직자들이 정권 실세의 날개 밑에서 하는 짓이 더 가관이다.

누가 골랐는지 몰라도 KDB산업은행 회장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까지 한 홍기택 씨는 “대우조선해양 지원(4조2000억 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결정했고 산업은행은 들러리였다”고 발뺌을 했다. ‘들러리’라는 표현은 맞을 것이다. 이런 정도의 일은 권력 핵심 몇 명이 정무적 판단과 함께 해법을 결정할 텐데 그가 뭘 할 수 있었겠나. 누릴 건 다 누린 한 폴리페서의 막판 처세 정도로 보면 맞다. 어처구니없는 건 그 때문에 한국이 AIIB 부총재직을 잃게 됐다는 것. 미국과의 외교적 손상까지 무릅쓰고 어렵게 참여해 얻어낸 자리였다.

준차관급인 진경준 검사장은 재벌 친구 덕택에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불법으로 엄청난 돈을 챙긴 뒤에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가 구속됐다. 현직 검사장이 구속된 건 검찰 역사상 처음이란다. 사립 명문대를 나온 교육부 공무원 나향욱 씨는 기자들과 술을 먹다 “99%의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막말을 했다. 머릿속에서야 무슨 짓, 무슨 말을 못 할까. 문제는 이런 판단밖에 못 하는 무능한 인간들을 중앙부처 요직에 앉힌 사람들과 인사 시스템이다.

여당인지 정권을 포기한 당인지 실체를 알 수 없는 새누리당은 여전히 친박이니 비박이니 듣기조차 지겨운 박박 소리만 내면서 당권 싸움에 한창이다. 새 정치를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쳤던 국민의당 의원들은 홍보비 리베이트 수사로 망신살이 뻗쳤다. 기성 정당들의 못된 버릇부터 보고 배운 탓이다.

내가 손해 보는 건 죽어도 안 된다는 민초들의 행태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청년 실업률은 사상 최고 수준인데 양대 노총은 ‘노동 개혁’은 절대 안 된다고 버틴다. 명심하시라. 혁명은 실업에서 시작됐다. 튀니지에서 대학을 나온 실업자 무함마드 부아지지 씨(당시 26세)가 분신자살을 한 게 2011년 재스민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과일 행상을 하다가 경찰 단속에 리어카를 빼앗기고 벌금까지 부과받자 절망했다.

아이들 건강을 지키고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희생을 분담하자는 요구에는 귀를 닫는 게 우리 국민이다.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은 정부 책임이니 그냥 싼값에 경유차를 계속 타고 다니는 게 장땡이란다. 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의 배치는 찬성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어림없다고 머리띠를 맨다. 사드반대대책회의 명단에는 광우병 파동 때부터 싸움질로 먹고살아 온 전문꾼들의 이름이 또 보인다.

나는 한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4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 어렵다고 본다. 밑천은 다 드러났다. 무엇보다 기본이 없다. 우리가 이룬 것에 대한 겸손함도 없다. 겸손하지 못하면 배움이 없고 성장도 없다. 국민의 수준이 결국 국가의 수준이다. 고상한 이론보다 덕행의 실천을 강조했던 독일의 종교사상가 토마스 아 켐피스는 “사람의 가치는 역경이 왔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렇게 희망이 없는 나라로 끝나는 것인가.

이종훈 정책사회부장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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