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갑식]욕먹는 아카데미가 부럽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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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지난달 29일 막을 내린 제88회 아카데미는 ‘역대급’으로 탈도 말도 많았던 시상식이었다. 시상식 이전부터 주요 부문에 단 한 명의 흑인 후보자도 없어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 So White)’는 비판이 불거졌다.

논란 속에 치러진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도전 20년 만에 오스카를 거머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수상이었다. 영화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한참 늦은 수상도 빠질 수 없다. 6번째 도전 끝에 영화 ‘헤이트풀8’로 오스카를 받은 88세 노장은 “아카데미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 감사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외신에 따르면 모리코네는 ‘타란티노의 계략’에 빠졌다. 당초 그는 이 작품의 음악을 맡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타란티노가 모리코네의 부인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부인이 남편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아카데미의 또 다른 볼거리는 무대에 오른 스타들의 말 말 말이다. “레버넌트를 촬영한 2015년은 지구온난화가 가장 심했던 해다. 인류 모두에게 커다란 위협이기 때문에 함께 나서야 한다.” 스태프에 대한 감사에 이은 디캐프리오의 말은 배우를 넘어 인간의 품격을 보여줬다. 이런 공감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현지에 살다시피 했던 배우 숀 펜처럼 그가 평소 환경문제에서 보여준 삶의 궤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카데미 스피치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은 어쩔 수 없이 인종차별에 맞춰졌다. “피부색이라는 것이 머리카락 길이만큼이나 의미 없길 바란다.”(감독상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보이콧해야 한다고? 내가 실업자라 그만둘 수가 없다.”(흑인 사회자 크리스 록)

오스카가 보기엔 황금빛이지만, 그 속살이 흰색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동아일보 영화팀이 2000∼2015년 16년간의 남녀 주연상, 조연상, 감독상, 작품상 등 주요 7개 부문을 최근 조사한 결과 흑인에게 돌아간 상은 11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1929∼1999년의 총 4개와 비교하면 나아진 것이다. 아카데미의 본질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위한 이벤트 중의 이벤트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니다. 이번 시상식에서 흑인 MC와 일부 유색인종에 대한 배려는 ‘눈치 없이’ 단 한 명의 흑인 후보도 내지 못한 아카데미 스스로의 반성문 아닐까.

그럼에도 한때 영화를 담당했던 입장에서는 아카데미가 부럽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알면서도 기사를 써야 하는 아카데미의 상품성이 얄밉지만 부럽다. 그 상품성에는 상을 준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정부에 대한 비판, 지구 차원의 이슈에 대한 발언, 치부마저 고백하는 스타들의 솔직함과 유머까지 포함돼 있다.

반면 대종상을 비롯해 국내에서 치러지는 각종 시상식을 지켜보면 화려한 쇼와 영상 등 볼거리가 적지 않음에도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축제의 백미는 당연히 수상자의 육성이다. 하지만 국내 스타들의 소감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이어 스태프는 물론이고 머리를 만져준 헤어 디자이너까지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지금 오장육부가 배 속에서 온통 즐겁게 떠들고 있네요. 아마 제가 수상한 것이 기쁜가 봅니다.” 말더듬이 국왕을 연기한 ‘킹스 스피치’로 2011년 남우주연상을 받은 콜린 퍼스의 말이다.

말더듬이에서 달변가로의 변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이제는 눈물과 고맙다로 채워진 소감보다는 다른 것을 기대한다. 무슨 말이든 못 하랴, 상 받은 날에.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아카데미 시상식#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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