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시진핑은 진박일까 가박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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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놀라서 당황하더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북핵 6자회담의 실효성을 거론하면서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시도하라”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놀란 이유는 뭘까. 그 내막은 공개하지 않았으니 경우의 수로 가늠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박 대통령이 사전 협의가 없었던 사항을 얘기했거나, 보고는 받았지만 하지 말았어야 할 발언을 했거나, 잘못 보고한 것을 대통령이 받아들였을 개연성이 있다.

5자회담 발언의 효과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응에서 바로 확인됐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 6자회담 고수 의지를 밝히며 5자회담 실효성을 반박했다. 한발 더 나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26일 기자회견에서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5자회담 발언이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를 앞두고 협력해야 할 나라들을 갈라놓은 셈이다.

한 가지 의문은 5자회담이 반드시 추진할 사안이라면 왜 공개적으로 언급했느냐는 것이다. 외교는 던져놓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관련국과 사전에 충분히 조율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어서다. 중국과 러시아가 찬성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접근한 배경이 궁금했다. 이에 외교 전문가는 “북핵 문제로 국내 정치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교가 아닌 정치적 판단이 개입됐다는 얘기다. 북핵 대응 실패라는 향후 국내 비난여론에 대비해 중국을 탓할 근거를 미리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가의 옳은 선택을 위해선 정확한 정보와 판단 근거를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집단 지성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외교부는 대통령의 눈치만 본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할 것 같다. 윤병세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엄중한 도발을 한 이 시점이 5자가 모여서 북핵 문제에 대해 심층적 협의를 할 아주 좋은 시점”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술 더 떴다. 그는 “2008년에 5자회담을 한 적이 있다”며 “한국이 서울에서 5자회의를 소집해 다음 날 6자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때부터 5자 협의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맥락이 다른 이 기억 때문에 5자회담 얘기가 나온 것은 아니었길, 진심으로 바란다. 당시 5자회의는 9·19 합의에 따라 국장급 실무자들이 북한에 제공할 경제, 에너지 지원 문제를 다룬 것이지, 지금처럼 북한 제재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 ‘5’를 제외하면 성격과 형식, 내용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의 5자회담 언급 맥락은 창의적인 새로운 방법을 찾으라는 의미이지, 그 예시를 국제사회에 제안하라는 뜻은 아니었을 듯한데….

지금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집중할 시간이다. 강력한 대북 제재에 호응하지 않는 중국을 차후에 압박할 명분도 쌓아야 한다. 수소탄 실험의 초기에 해당한다는 북핵 문제의 성격 변화는 장기적 접근법과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5자회담 등 중국을 압박할 카드를 미리 써버렸다. 힘 조절도 못하고 장·단기적 접근법도 구별하지 않다가 중국, 러시아와 감정부터 상했다. 외교가에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진박(진실한 친박)이냐, 가박(가짜 친박)이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이젠 한국 정부가 장기적인 협상의 틀을 만들 때다. 그걸 못하는 외교안보팀이라면 교체해야 한다. 테이블 모양 때문에 그동안 비핵화 협상이 공전한 게 아니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시진핑#진박#윤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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