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형주]보물창고로 이끌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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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이족 학교에 우물 파놓았더니 “귀한 물이 생긴다”… 아이들 찾아와
과목 수 줄인다고 공부관심 늘지 않아… 중요한건 ‘동기부여’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여러 해 전 여름에 방문했던 아프리카 케냐에서는 한국인 여행자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잦은 시대지만 오지 여행은 아직은 남의 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초행길이 으레 그러하듯 아프리카 방문의 설렘을 안고 수도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내부를 꽉 채운 거대한 인물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케냐인이고 친할머니가 케냐에 생존해 있는 사람, 그해 초에 역사상 첫 흑인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사람, 버락 오바마였다. 취임 후 벌써 8개월이 지난 때였으니, 케냐인들의 감격과 자부심이 전해져 왔다.

적도 근처의 이 나라는 여러 색깔로 다가왔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의 커피 농장이 있던 곳이어서일까? 진한 맛의 커피가 지천이었다. 지내던 숙소에서도 마실 물은 유료인데 커피는 공짜여서 즐거웠다. 사탕수수로 만든 보드카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40여 다종족으로 구성된 이 나라에서 우리 일행이 여행 기간 대부분을 보낸 곳은 소수종족 마사이족의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교실 하나만 있는 작은 학교에 들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업이 함께 이루어지는 이곳에는 하루에 몇백 리 길을 우습게 걷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 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부모들은 소 떼를 몰아야 하는 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하고, 아이들도 학교보다는 드넓은 평원을 좋아하니….

외국의 어느 원조기구가 학교 뒷마당에 우물을 파주면서 달라졌다. 수업 후 우물에서 물을 한 통씩 퍼가게 했더니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 뭐가 생기는지 의심했는데, 귀하디귀한 물이 생기는 걸 알았으니까.

시작은 그러했으나, 그중 일부는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사실들의 논리적 관계를 규명하고 유의미한 결론에 다다르는 ‘생각의 기술’을 익힐 것이다. 자신의 조국을 부국으로 바꾸는 지도자도 나올 것이다.

오바마가 첫 대선 전에 쓴 책의 제목이 ‘담대한 희망’이던가? 선거 전에 정치인들이 책 쓰는 것이 뭐가 새로우랴만, 이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실정치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사람을 열광적 지지자로 만들었다.

교육에서 지식의 전수는 작은 부분에 불과한데, 지식의 양이 폭증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식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찾아서 배우도록 하는 게 교육의 본질이어서, 아이가 배우고 싶게 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이룬 것이다. 오바마의 책은 세상에 대한 무력감과 정치에 대한 냉소로 가득하다는 미국 젊은이들이 변화를 위해 스스로 나설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니 어쩌면 성공한 교육 실험의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북유럽의 핀란드를 방문했는데 엉뚱하게도 케냐가 떠올랐다. 두 나라는 학교에서 가르칠 지식의 내용에 대해서는 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먼저 아이가 배우고 싶도록 만드는 데 공을 들이는 점은 비슷하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에 대해선 오해도 많고 와전된 것도 있다. 융합교과를 신설해서 기존 과목들을 대체한다는 게 대표적이다. 헬싱키에서 만난 핀란드 교육과정위원회의 이르멜리 할리넨 위원장은 오해라고 단언했다. 핵심 교과목은 유지되고 ‘추가로’ 여러 교과목의 교사가 함께 설계하고 진행하는 융합과목을 만든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세상 문제에 녹아 있는 역사 지리 수학 물리학 등의 생생한 상호작용을 체감하도록 해 깊이 있는 전공과목의 필요를 스스로 느끼게 하자는 것이지, 핵심 과목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강한 학습동기를 갖고 오는 학생들을 맞이하는 핵심 과목은 오히려 강화된다.

교과 내용이 과다해 아이들이 학습을 포기하는 거라는 대증 처방은 정말 근시안적이다.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고, 해도 딱히 얻는 게 없으니 재미없는 건데. 수많은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교과과정을 줄여 왔지만 아이들의 흥미도가 늘어난 적이 있던가?

마사이 학교는 물을 사용하고 핀란드 학교는 융합교과를 사용할 뿐, 그 목표는 같은 것이었다. 보물창고로 아이들을 이끄는 등불의 역할. 배움이 자기 삶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아이에게 주는 것. 이것으로 교육의 반은 이루어진 것 아닌가?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 아주대 석좌교수
#교육개혁#아웃 오브 아프리카#마사이#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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