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믿을 건 하늘뿐인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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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사회부 차장
이동영 사회부 차장
심각했던 가뭄이 결국 해결됐다. 쩍쩍 갈라진 논에 소방차와 급수차를 끌어다 물을 뿌리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비가 해결사였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이어지는 가뭄은 거의 매년 반복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등장한 염해가 올해는 더 극심해 벼농사를 망친 지역이 경기 파주와 인천 강화도 일대에 적지 않다. 지난달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강화 가뭄 현장을 찾아간 이유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농민들에게 “여러분이 이렇게 애쓰시니 하늘이 도우시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이런 대책도 직접 발표했다.

“준설 작업도 이때 장마가 오기 전에 해서 아주 물의 양도 많이 늘릴 수 있도록 지원을 하겠습니다.”

기자 입사시험이나 입시 논술 시험에 썼다가는 빨간 줄이 그어질 비문(非文)성 발언이라는 지적은 뒤로 미루더라도 가뭄 대책을 말하는 것인지 장마 대비책을 언급한 것인지 헷갈린다. 문장만 보면 장마가 오기 전에 미리 준설해 저류 용량을 키워 홍수 피해를 줄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미 농사를 망쳐 버린 농민을 향해 이제 준설을 하겠다는 게 무슨 가뭄 대책인가. 국정 최고 책임자가 물차를 끌어다 논에 물을 뿌리고 홍수 대책과 헷갈리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갔고 결국 하늘에서 내린 비가 가뭄을 해소해 줬다.

하지만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4대 강의 보와 지류를 연결하겠다거나 새로 댐과 보를 확충하겠다는 근본 대책은 지금도 들리지 않는다. 내년 이맘때도 ‘극심한 가뭄에 농민 마음이 타들어 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쏟아지고 대통령은 말라 버린 논밭에 또 찾아가 물을 뿌리며 하늘이 도와주길 기다릴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이유다. 타들어 가는 농민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전임 대통령의 사업에라도 기대는 게 정도다.

이 정부는 현안 해결을 위해 뿌리에 접근하지 않고 그저 하늘이나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기다림의 정부’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변죽만 울리다 자기들 권력다툼의 소재로 변질시켜 버렸다. 국민은 그들만의 ‘변질된 장기 전투’에 관심도 보이지 않게 됐다. 시간이 약인 셈이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는 정부의 맹탕 방역망을 쉽게 뛰어넘으며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다행히 의료진의 헌신적 사투로 그나마 큰 불길을 잡고 국민의 우려도 사그라드는 중이다. 이 정부는 연이어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지만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도 문제가 잊혀지거나 스르르 풀려 가고 있으니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정부 사람들에겐 운이 좋아 다행일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불행해지고 위험에 빠지는 건 누굴까. 메르스는 꺾였지만 요상한 이름의 다른 전염병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비슷한 혼란과 공포가 다시 몰아칠 것 같다. 방역과 격리 범위를 어느 수준으로 설정하고 강제 격리는 언제 할지, 환자 치료 시설은 어디에 둘 것인지, 이번 메르스 때 겪었던 혼란의 이유가 아직도 교통정리 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끊이지 않는 나라의 혼란을 보면서 대통령이 뭔가 명쾌하게 풀어낼 것이란 기대를 접었지만 최근 다시 기대를 갖게 됐다.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딱 부러지게 제시한 덕분이다. 정치적 배신자가 누구인지 지목해 그를 이 바닥에서 영구 퇴출시키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만방에 알렸다. 당장 쫓아내야 하고 선거에서 뽑지 말라는 엄포도 내렸다. 이런 수준의 목표 설정과 해결책 제시라면 가뭄이든 메르스든 뭐가 닥쳐도 하늘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기대며 살아도 되지 않겠나.

이동영 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가뭄#비#기다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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