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 잔뼈 굵은 회장님 ‘재무-인사-기획-경영’도 척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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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한국기업 이끄는 이공계 전공 CEO들

재계 이공계 출신들의 강세는 신입사원 채용에서도 나타난다. 상반기 ‘4대그룹’이 선발한 신입사원의 85% 정도가 이공계 출신이다. 동아일보DB
재계 이공계 출신들의 강세는 신입사원 채용에서도 나타난다. 상반기 ‘4대그룹’이 선발한 신입사원의 85% 정도가 이공계 출신이다. 동아일보DB
재계에서 ‘최고경영자(CEO)=상경계열 출신’은 이제 한물간 공식이 됐다. 새롭게 떠오른 공식은 ‘재계 리더=이공계 출신’.

실제로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CEO 3인방’인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소비자가전(CE)부문 사장, 신종균 IT모바일(IM)부문 사장은 모두 이공계 출신이다. 다른 삼성그룹 계열사, 현대자동차그룹, LG그룹, SK그룹 계열사 CEO 중에도 이공계 출신은 많다.

경영전문 매체인 ‘월간 현대경영’이 올해 4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CEO 가운데 51.1%가 이공계 출신이다. 1994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이공계 출신 CEO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 건 처음이었다.

‘이공계 강세’ 현상은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이른바 ‘4대 그룹’의 상반기(1∼6월) 신입사원 중 85% 정도가 이공계 출신이다. 특히 LG화학은 상반기 신입사원 전원을 이공계로 뽑았다. 현대차는 상반기부터 아예 인문계 대졸 공채를 없애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뽑는 상시 채용 제도를 도입했다.

기업들이 이공계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문계 출신이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매우 힘들지만 이공계 출신이 재무·인사·기획 같은 업무를 익히는 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이다.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영지원보다는 연구와 개발 인력 수요가 늘어난 것도 이공계 선호 이유로 꼽힌다.

전병준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인사조직)는 “기술의 첨단화와 융복합화로 인문계 출신이 기술을 이해하기란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지만 이공계 출신들은 오히려 인문계 관련 지식을 쌓기가 더 쉬워졌다”며 “기업들로선 이미 ‘기술 마인드’를 갖춘 이공계 인력을 뽑은 뒤 필요할 경우 인문계 관련 교육을 받게 하는 게 효과적인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재계에선 ‘이공계 출신들이 주류를 넘어서서 앞으로는 완전히 장악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공학한림원은 이공계 출신 인사들의 ‘명예의 전당’

많은 이공계 출신 재계 인사들은 ‘이공계 리더’란 권위와 명예가 단순히 △소속 회사의 위상 △직책과 직급 △최종학력 같이 눈에 보이는 스펙으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대신 ‘엔지니어로서 확실한 권위와 명예가 있다’고 인정받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타이틀이 있다. 바로 한국공학한림원(공학한림원) 회원이다.

삼성그룹 전자계열사의 한 임원은 “이공계 출신으로 부사장급 정도 지위에 올랐고, 기술 부문에서 내세울 만한 성과가 있는 인사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타이틀”이라며 “운동선수와 문화예술인으로 치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것 같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31일 공학한림원에 따르면 전체 회원 878명 가운데 대학이나 국가출연연구소를 제외한 기업 출신 인사(전직 포함)는 총 176명(20%)이다. 대표이사급이 83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장급 28명, 고문·자문역과 부사장급이 각각 18명, 부회장급 12명 등의 순이다.

기업 중 가장 많은 공학한림원 회원을 배출한 곳은 삼성그룹이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16명)를 중심으로 총 26명의 공학한림원 회원을 배출했다. LG그룹과 현대차그룹 소속 인사들이 각각 17명과 11명으로 뒤를 이었다.

특이한 건 재계 출신 공학한림원 회원들의 소속 기업뿐 아니라 학력과 경력도 다양하다는 점이다. ‘박사’가 101명(57.4%)으로 다수지만 ‘학사’도 53명(30.1%)이나 된다. 또 중견기업과 벤처기업 인사도 79명(44.9%)이나 된다.

연구원형 이공계 리더

재계 출신 공학한림원 회원 중에는 해외유학, 연구소 활동 등의 경력을 지닌 이가 많다. 대부분 연구원 생활을 거쳐 CEO 같은 최고위직에 오른 이들이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양웅철 현대·기아차 연구개발 총괄 부회장, 임형규 SK 정보통신기술(ICT) 기술성장추진 총괄 부회장 같은 인사들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한다.

허 회장은 ‘오너’로서는 드물게 사회생활을 연구원으로 시작했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세계적인 에너지 기업인 셰브론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오너로서는 드물게 생산 공장에서도 근무했다. 허 회장이 재계에서 ‘닥터 오일’ ‘미스터 오일’로 불릴 만큼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권 회장은 1986년 포스코(당시 포항제철)가 출연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 입사해 포스코 기술연구소장, RIST 원장, 최고기술책임자(CTO) 등을 거친 전형적인 연구파 엔지니어다. 포스코가 자랑하는 기술인 ‘파이넥스 공법’을 비롯해 자동차강판과 전기강판 등 신소재 개발, 배터리 필수 소재인 리튬 추출 신기술 등이 권 회장의 손을 거쳤다. 그는 연구원 시절부터 수익성이 높은 기술 연구를 강조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실용주의적 성향 때문에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일반적인 코스’인 대학교수 대신 기업 연구원을 택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반도체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삼성맨’이 된 권 부회장은 16메가 D램과 64메가 D램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메모리와 달리 삼성전자가 약세를 보이는 시스템LSI 부문에서도 기술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CEO가 된 뒤에도 세부적인 보고는 차장과 과장급 같은 실무자들에게 자주 받을 만큼 격식을 안 따진다. 연구와 기술개발과 관련해선 ‘고정관념을 깨라’고 자주 강조한다. 스스로를 임직원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최고건강책임자(CHO)라고 부르는 권 부회장은 최근 임원들에게 ‘젊은 직원들을 자식처럼 대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연구개발(R&D) 사령탑인 양 부회장은 미국 포드자동차연구소에서 17년간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가 현대·기아차에서 이룩한 성과는 자동차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것들이다.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카’ ‘제네시스’ ‘에쿠스’ 같은 현대차의 유명 모델 개발을 주도했다. 회의나 보고 때 현안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고 한다.

임 부회장은 반도체 전문가들 사이에서 ‘미스트 낸드’로 불릴 정도로 낸드플래시에 정통하다. 올해 초 SK에 합류하기 전 삼성전자에서 활동했던 임 부회장은 삼성전자 CTO와 삼성종합기술원장을 지냈다. 최태원 SK 회장이 영입에 직접 나섰을 만큼 그룹에서 임 부회장에게 거는 기대도 크다. 임 부회장은 신성장동력 발굴에 필요한 융복합 기술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필드형 이공계 리더

연구원보다는 ‘현장 개발자’ 성격이 강한 재계 출신 공학한림원 회원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삼성전자 윤부근 CE부문 사장, 신종균 IM부문 사장, LG화학 박진수 부회장 등이 꼽힌다.

윤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임에도 2006년 ‘보르도 TV’를 통해 TV 시장의 경쟁 패러다임을 기술력에서 디자인 중심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그는 얇은 TV를 구현해 내는 데 필요한 부품 최소화와 두께 줄이기 작업, 디자인과 기술 부문의 협업 등을 직접 지휘했다. 개발자들이 ‘더이상은 불가능하다’고 할 때마다 ‘할 수 있다’고 독려해 성과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 사장은 삼성전자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 S 시리즈’ 개발 주역이다. 2009년 말 갤럭시 S 시리즈를 개발할 때 일주일 이상 숙식을 회사에서 해결하며 매달린 것으로 유명하다.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땐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현장을 지키며 결과를 마무리하는 건 그가 젊은 시절부터 유지해온 엔지니어로서의 습관 중 하나다.

박 부회장은 전자 산업 등에 많이 쓰이는 고기능성 소재인 합성수지(ABS) 사업을 세계 1위로 키운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생산 현장 경력이 15년 정도 될 만큼 풍부한 박 부회장은 실무자 시절 문제가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창업자형 이공계 리더

중견기업과 벤처기업 출신 공학한림원 회원 중에는 작지만 탄탄한 기업을 인수 또는 창업해 이끌고 있는 인사도 많다. 이정훈 서울반도체 사장과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사장은 발광다이오드(LED) 분야 특화 기업인 서울반도체를 1992년 인수해 ‘매출 1조 원’ 기업으로 키웠다. 1만1000여 건의 LED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R&D를 강조한다. 이 사장은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LED 분야 권위자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미국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와 10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오며 자문하고 있다. 나카무라 교수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회사가 작고 유명하지도 않았지만 ‘1등 LED 기업을 만들겠다’며 자문해 오는 이 사장의 기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자문에 응했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원조 대학생 벤처기업가’로 불린다. 대학 3학년이던 1983년 의료정보 분야 소프트웨어 기업인 비트컴퓨터를 창업했다. 소프트웨어 교육기관인 ‘비트스쿨’을 만들어 이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인력들을 6개월간 혹독하게 교육하고, 젊은이들에게 창업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공학한림원은 재계 출신 회원 수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공학한림원 관계자는 “기업들이 신성장동력 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R&D 투자를 늘리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창업 강조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며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재계 출신 회원 수도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CEO#한국기업#이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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