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맛본 달콤한 자유… 쿠바 떠난게 인생 최대 행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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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통합교육 현장을 가다]
<中>美, 쿠바인 이송 ‘페드로판 작전’ 성공 모델된 카르멘의 52년 삶

1962년 8월 ‘페드로판 작전’으로 미국 마이애미에 도착했던 카르멘 발디비아 씨가 올해 5월 자신이 머물던 플로리다시티 캠프를 다시 찾았다(위 사진). 카르멘과 언니 이사벨(아래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은 미국 정착 3년 만에 부모님을 만났고, 그제야 밝은 소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애미=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1962년 8월 ‘페드로판 작전’으로 미국 마이애미에 도착했던 카르멘 발디비아 씨가 올해 5월 자신이 머물던 플로리다시티 캠프를 다시 찾았다(위 사진). 카르멘과 언니 이사벨(아래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은 미국 정착 3년 만에 부모님을 만났고, 그제야 밝은 소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애미=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쿠바 아바나 공항의 ‘페세라(La Pecera)’는 이상한 곳이었다.

페세라는 공항 한쪽 구석에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출국대기실을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 8, 9시간 붙잡혀 있다 보면 어항이라는 뜻의 페세라는 어느덧 ‘악몽의 장소’로 바뀐다. 1962년 8월 8일. 당시 14세인 언니 이사벨과 함께 페세라에 들어선 12세 소녀 카르멘 발디비아는 잔뜩 긴장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미국으로 떠나려는 어린아이들의 소지품까지 빼앗았다. “소지품 모두가 쿠바의 것”이라는 이유였다. 카르멘의 가죽 여행용 가방도 표적이었다. 카르멘에게 허용된 유일한 소유물은 엄마가 준 손가락 크기의 중국 인형이었다.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또래 아이 중 상당수는 이런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 페드로판 작전(Operation Pedro Pan)

1950년대 후반 카리브 해의 파리로 불렸던 쿠바의 수도 아바나. 언제나 음악과 춤이 넘치는 흥겨운 곳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과 함께 바뀌었다. 지하에서 반(反)카스트로 항쟁을 벌였던 부모들의 걱정이 커졌다. 쿠바 공산정권이 학생 일부를 옛 소련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학생 상당수를 시골로 보냈기 때문.

쿠바 사회주의 혁명의 바람이 거세지던 1960년 12월 아바나 러스턴아카데미 교장이던 제임스 베이커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미국 마이애미로 건너간 그는 가톨릭교회 복지사무소(CWB) 국장이던 브라이언 월시 신부를 만나 쿠바 어린이들의 미국 입국 방법을 논의했다. 이듬해 초 국무부와 접촉한 월시 신부는 마이애미 가톨릭교구가 쿠바 어린이에 한해 비자면제 서류를 발행할 수 있는 파격적인 지원을 허락받았다. ‘페드로판 작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페드로판은 ‘피터 팬’의 스페인어 표현. 공산혁명에 반기를 든 쿠바 중산층 부모의 자녀 1만4048명은 1960년 12월 26일부터 1962년 10월 23일까지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마이애미로 향했다.

카르멘이 고향을 떠난 것은 페드로판 작전 후반기였다. 집을 떠나 공항으로 가는 길. “차창 뒤로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선 무력감이 느껴졌어요. 그날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어요.” 카르멘의 눈시울은 여전히 뜨거웠다.

○ 쿠바가 미국으로 옮겨진 듯한 캠프 생활


페세라에서 대기하던 카르멘과 이사벨은 해질 무렵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아바나에서 마이애미까지 비행기로 걸린 시간은 불과 40여 분. 공항에 도착하자 조지 과르치 씨가 나타나 서류 수속을 도왔다.

카르멘은 플로리다시티라는 곳으로 향했다. 12∼14세의 남녀 어린이들이 머무는 이곳은 카르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초콜릿 밀크의 맛은 환상적이었고 칫솔과 잠옷을 나눠준 친구들은 친절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치 쿠바가 미국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언니도 있고 주변엔 모두 스페인어를 쓰는 페드로판으로 가득했던 것.

그렇다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쿠바 여성에게 15세의 생일은 무척 중요한 날이다. 성인이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 언니 이사벨의 15세 생일 파티가 그해 12월 24일 열렸지만 부모님이 없다는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그날 밤 자매는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딸을 떠나보낸 부모라고 마음이 편했을까. 이제는 딸과 함께 지내는 카르멘의 어머니 리오노르 씨(80)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딸이 떠나는 것은 내 심장의 한쪽을 떼어내는 듯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고 기억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해가 바뀌어도 잊혀지기는커녕 커지는 법이다. 가족을 두고 떠나온 탈북자, 수많은 이산가족의 심정과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 잊을 수 없는 쿠바 미사일 위기

페드로판 어린이들을 공포에 빠뜨린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카르멘이 머물던 플로리다시티는 비행장 옆에 자리한 곳.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인 이곳은 쿠바의 미사일이 겨냥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카르멘이 플라밍고 공원으로 현장학습을 나선 어느 날의 일이다.

“쿠바를 겨냥하고 있는 미국 미사일들을 봤습니다. 미사일이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하고 있다는 공포감에 아이들은 모두 며칠간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미사일 위기의 한가운데 있었던 겁니다.”

미사일 위기는 13일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감정은 다시 복잡해졌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상업 비행기 운항이 중단되면서 페드로판 작전이 종료된 것. 전쟁의 위기가 사라져 부모님은 안전해졌지만 비행기 운항 중단으로 재회의 시간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것. 카르멘은 이를 “달콤쌉싸름한(bittersweet) 감정”이었다고 기억했다.

카르멘의 부모는 1965년 여름에야 멕시코를 거쳐 마이애미로 왔고, 3년 만에 만났다. 미국에 도착한 카르멘의 부모는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는 세탁기와 가구 수리를 했고 어머니는 의류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여느 이민자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미국 쿠바 간 상업 비행은 중단 3년 만인 1965년 12월에 ‘자유의 비행(Freedom Flight)’라는 이름으로 재개됐다. 이듬해인 1966년 6월에야 페드로판의 90%가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페드로판과 가족의 재회 시간이 늦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월시 신부는 미국 적응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페드로판 보호 작전이 교육 작전으로 바뀐 셈이다. 페드로판에게 안식처와 교육을 제공하는 데 미국 35개 주와 100여 개 도시가 동참했다.

○ 페드로판의 미국 적응기


홀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페드로판은 스스로 강인해지는 법을 터득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남자 아이들이 모여 있던 캠프 마타쿰베에는 야생의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후안 푸욜 씨(62)는 깊은 숲 속의 야영지와 같은 곳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잔디밭에 앉아있던 그에게 친구들이 소리쳤다. “푸욜, 움직이지 마!” 방울뱀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카스트로였다고 한다. “쿠바에서 독을 품은 짐승은 카스트로 말고는 없다.” 가족과 떨어지게 만든 카스트로에 대한 미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페드로판은 캠프에서 지내는 동안 나이에 따라 인근의 미국 초중고교에 다녔다. 대부분은 수학과목에서 좋은 학업 성과를 발휘했다고 기억했다. 영어를 해석할 필요 없이 숫자만 다루면 됐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이민이 그렇듯 나이가 어릴수록 적응도 쉽고 빨랐다.

루이스 쿠에르보 미국 라틴상공회의소 국장은 “처음엔 영어를 못해 매일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는 길거리에서 학교 친구들을 만나 해가 질 때까지 야구와 축구를 하는 등 부대끼면서 친해졌다.

플로리다 캠프 인근의 학교에 다녔던 카르멘도 영어를 배우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학급 친구들의 격려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 페드로판 찾기 운동

페드로판은 성공적인 이민사를 일궈냈다. 2008년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을 주도했던 일리애나 로스레티넌 전 하원 외교위원장(플로리다)도 페드로판 출신. 현재 페드로판 출신 상원의원이 3명, 하원의원이 5명이다.

페드로판이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98년. 공항에서 페드로판을 제일 처음 안내했던 조지 아저씨의 장례식에서 월시 신부가 모임을 제안했다. 이 모임은 1991년 ‘페드로판작전그룹(OPPG)’이라는 비영리 조직으로 발전했다. OPPG는 정착을 도운 미국 사회와 월시 신부의 뜻을 기려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나서고 있다.

2010년 12월에 열린 페드로판 50주년 행사에서 예술가인 마노가 ‘라 말레타(La Maleta·트렁크)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전환점이 마련됐다. 트렁크 하나에 의지해 미국으로 들어온 아이들을 상징한 설치예술 작업은 페드로판의 아이콘이 됐다. 자신이 페드로판인 것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들이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 미국에서 정착한 지 50여 년. 카르멘에게 “페드로판은 이제 피터팬이 됐느냐”고 물었다. 이민자에서 미국 시민으로 완벽하게 동화됐는지 궁금했다. 카르멘은 “미국 사회에 완벽히 동화됐지만 여전히 우리는 페드로판”이라며 “우리는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쿠바인”이라고 강조했다.

카르멘은 설계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이젠 현직에서 은퇴한 그는 페드로판의 미국 정착 과정과 흔적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달았다. 페드로판은 ‘역사상 가장 행복한 탈출(the happiest exodus)’이었다는 것을….


마이애미=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통일#쿠바인 이송#페드로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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