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치영]임영록 ‘명예회복’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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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신치영 경제부 차장
국내 은행권에서 주전산기를 IBM의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 체제로 바꾸려고 가장 먼저 시도한 곳은 2002년 옛 한미은행이었다. 당시 국내 은행들은 모두 IBM 메인프레임을 쓰고 있었다. IBM은 이런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메인프레임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았다. 유지보수 비용까지 비쌌다. 용량을 쉽게 늘릴 수 없어 거래 건수가 크게 늘 경우 새것을 추가로 구입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미은행 경영진은 비용 절감을 위해 메인프레임과 대체 관계에 있는 유닉스 체제로 전산기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메인프레임은 IBM 혼자 만들지만 유닉스는 IBM뿐 아니라 오러클, HP 등 여러 회사가 생산한다. 업체 간의 경쟁이 이뤄져 메인프레임에 비해 값도 많이 낮았다. 국내 증권회사들은 이미 대부분 유닉스 기종으로 갈아탄 상태였다.

기업 정보기술(IT) 담당자들은 통상 전산시스템 교체와 관련해 보수적 태도를 보인다. 에러가 나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미은행 IT본부도 시스템 불안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경영진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당시 한미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교체 결정이 이뤄진 뒤에 IBM 측이 ‘가격을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고 말했다. 한미은행 경영진은 “이미 결정 난 일”이라며 거부했다. 75% 정도 진행된 한미은행의 전산기 교체 작업은 2004년 미국 씨티은행과의 합병 과정에서 잠시 보류됐다가 합병 후 다시 추진됐다. 현재 한국씨티은행은 소매금융 등 일부 업무를 유닉스로 처리하고 있다.

새삼 12년 전 한미은행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내용이 요즘 국민은행에서 벌어지는 일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4일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이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종 위법·부당행위를 저질렀다며 중징계를 결정했다. 금감원 발표를 요약하면 임 회장이 은행 IT본부장 인사에 개입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주전산기를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교체하려 했고 이 행장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리베이트 등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란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계는 리베이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금감원은 이미 임 회장과 이 행장은 물론이고 사외이사들의 계좌까지 추적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한 은행장은 “제조업체 간 경쟁이 치열한 유닉스는 마진이 적어 리베이트까지 제공하면서 일을 따내려는 업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 발표 직후 이 행장은 사퇴했지만 임 회장은 본인과 KB 임직원의 ‘명예회복’을 다짐하며 금감원 결정의 부당함을 연일 주장하고 있다. 임 회장은 경영상 판단으로 전산기 교체를 추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감독당국이 이를 ‘범죄행위’로 몰고 있으니 억울할 만도 하다.

하지만 KB금융의 회장직을 계속 수행하기에는 임 회장이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는 게 금융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리딩뱅크’로서 국민은행 명성에도 크게 금이 갔다. 2007년까지만 해도 사상 최대 규모의 순이익을 내며 2위를 멀찌감치 따돌렸던 국민은행은 올해 상반기 주요 은행 중 꼴찌 수준의 순이익을 냈다. 임 회장은 금융위의 최종 결정 과정에 자신의 주장을 적극 개진하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의 신청과 행정소송까지 벌이겠다는 생각이다. 이 절차는 수개월에서 1년 넘게 걸릴 수도 있다. 그사이 KB금융의 경영은 더 흔들릴 것이다.

명예회복이 목표라면 현직에 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길도 있다. KB금융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 출발의 계기다. 물론 결단은 임 회장의 몫이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임영록#KB금융#IT본부장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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