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암을 이긴 시골우체국장 이승수씨… 내친김에 평론가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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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약효’에 눈떴다… 주중엔 완주우체국장 주말엔 특강 강사

공무원 36년차 ‘시골우체국장’인 이승수 전북 완주우체국장은 영화평론가, 심리치료 전문가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이 국장은 “요즘 50대 중년은 ‘핫 에이지’”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100세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이 6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공무원 36년차 ‘시골우체국장’인 이승수 전북 완주우체국장은 영화평론가, 심리치료 전문가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이 국장은 “요즘 50대 중년은 ‘핫 에이지’”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100세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이 6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국장님, 준비 마치셨죠?” 머릿속이 하얘졌다. 입안에 침은 마른 지 오래. 공연히 물을 한잔 들이켜 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사둘 걸 그랬군.’ 손때 묻어 까맣게 변한 원고는 땀에 절어 너덜너덜해졌다. 한두 번 강연해 본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다.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승수, 넌 잘할 수 있어. 한다면 하는 놈이잖아.’ 넥타이를 고쳐 매자 사회자가 그를 부른다. “영화로 당신의 마음을 치료해 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승수 씨입니다!” 100여 명이 들어찬 전주 최명희문학관 강당에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대 계단에 발을 딛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됐다.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치료’ 강연의 주인공은 전북 완주우체국장, 아니 영화평론가 이승수 씨다.》
쪼깐 국장, 암에 걸리다

“직장은 당분간 쉬셔야겠네요.”

8년 전인 2004년의 그 가을날에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위암이란다. 감기 한번 앓아본 적 없는데 암에 걸리다니. 정기검진에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황사도 불지 않았건만 그날따라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 신호대기에 걸릴 때마다 오른손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바빴다. 이제 고작 마흔여덟, 정년퇴임도 10년 넘게 남았는데… 꽃 같은 딸내미 시집도 보내야 하는데… 평생 고생만 한 불쌍한 아내는 누가 지켜주나….

공무원 생활 28년 만에 처음 병가를 신청했다. 부하직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독하게 몰아치더니, 그럴 줄 알았어.’ 후배들의 겉치레 위로를 뒤로하고 조용히 짐을 쌌다.

“딱 이맘때였어요. 전남 여수 요양병원으로 가는 길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터널을 이뤘죠. 그렇게 예쁜 단풍 길을 달리는데 서러워서 눈물밖에 안 납디다.” 2년 전 받은 자랑스러운 사무관 명판조차 허무하게 느껴졌다. 전북 관내 우정공무원 3600명 중 30명에게만 허락되는 영광의 자리였는데….

직장에선 시쳇말로 ‘끗발 날리던’ 에이스였다. 1986년 장수우체국 우편창구에서 일하던 그를 전북체신청(현 전북지방우정청) 청장이 직접 데려와 수행비서 역할을 맡겼다. 9급 임용 10년 만에 맞은 7급으로의 승진. 지역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 인사에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았다. 쑥덕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일에만 매달렸다.

본부 업무보고, 국정감사 총괄 등 체신청의 중요한 업무가 모두 승수 씨 몫이었다. 청장은 2년마다 바뀌었지만, 새로 부임하는 청장들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천하의 이 주사’부터 찾았다. 새벽 2시 퇴근을 예사로 하던 그를 동료들은 ‘쪼깐’이라고 불렀다. 162cm의 ‘쪼깐한’ 키에 잔정도 없이 불도저처럼 부하직원을 몰아치는 그에게 딱 맞는 별명이었다. 직원 대상 인기투표에선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래도 괘념치 않았다. 그에겐 일만이 세상의 전부였으니.

미친놈처럼 웃긴 왜 웃어?

요양병원은 그에게 ‘무서운 곳’이었다. 몸은 쉴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기댈 곳은 아니었다.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 말기암 환자의 모습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변에 있던 환자가 며칠 뒤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매일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내고는 바다를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었다. ‘여기가 절벽이구나.’ 아파 죽으나 떨어져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약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울고 병실로 돌아오는 길, 병원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신의 마음을 치료해 드립니다-웃음 치료법’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시시덕거리라고?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아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그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병원 강당으로 향했다.

이승수 씨가 6일 전북 완주우체국 창구에서 직원들과 최근 본 영화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다. 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승수 씨가 6일 전북 완주우체국 창구에서 직원들과 최근 본 영화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다. 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웃음도 운동입니다. 웃으려면 웃을 준비를 갖춰야 해요. 두 손을 올리시고, 손끝으로 머리를 콩콩 쳐 봅니다. 이제 최불암 씨처럼 입을 벌리면서∼ 웃어봅니다. 파하∼”

‘크게, 길게, 온몸으로’ 웃으라는 강사의 말에 한참을 억지로 웃었다. ‘미친놈이 따로 없군.’ 투덜대며 병실로 돌아왔지만, 어느새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최불암처럼 크게 웃으라고?’ 제대로 웃어본 게 언제였던가. 쉰을 앞둔 중년의 나이가 불현듯 쓸쓸하게 느껴졌지만 그럴 때면 마음을 다잡고 웃음에 집중했다. ‘두 손을 올리면서∼ 파하∼.’

우습게 봤던 웃음치료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입원 6개월 만에 퇴원해 사무실로 복귀했다. 동료들은 그의 퇴원보다 변한 표정에 더 놀랐다. 생전 미소 한번 보이지 않던 얼굴에 매일 웃음꽃이 피었다. 왕년의 독기가 다시 한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왕 시작한 웃음치료, 제대로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주위에서 “지금은 몸을 간수할 때”라며 말렸지만 그의 사전에 ‘적당히’는 없었다.

웃음치료 과정을 개설한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에 등록했다. 2년간 일주일에 두 번 전주에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캠퍼스로 꼬박꼬박 통학했다. 수업시간을 합쳐 왕복 10시간이 걸렸지만 배움의 재미에 한번 빠지니 힘든 줄도 몰랐다.

“암에 걸린 위장보다 지친 마음이 더 문제였던 거예요. 병든 몸이 병든 마음을 치료한 셈이지요.” 53세 승수 씨는 그렇게 힘들고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졌다.

영화로 마음을 치료하세요

웃음치료로 시작한 심리치료 공부는 ‘영화치료’란 생소한 분야로 이어졌다. 대학원 수업시간에 우연히 접한 게 계기가 됐다. 좋아하는 영화를 통해 심리치료까지 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영화 1000편을 보고 나면 감이 올 것 같다는 생각에 매일 밤마다 집에서 비디오를 끼고 살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로는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가 운영하는 영상응용연구소에서 영화치료 전문가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 보셨죠? 은수(이영애)가 라면을 권하는 장면에서 상우(유지태)는 은수에게 김치 담글 줄 아느냐고 물어봐요. 라면은 일회성을, 김치는 지속성을 보여주는 메타포(은유)예요.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자는 은수,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고 되묻는 상우… 영화를 공부하니 이런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친김에 글도 쓰기 시작했다. 전북도민일보 ‘독자광장’란에 영화평을 투고했다. 평론 데뷔작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시렁 위에 겹겹이 쌓인, 세탁하지 않은 옷가지와 같은 삶의 편린을 보는 답답함을 느꼈다”는 그의 글은 투박하지만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민일보에서 “이참에 아예 연재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평범한 시골우체국장에서 심리치료 전문가로, 영화평론가로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골우체국장의 영화에세이’가 2010년 7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총 68편 연재됐다. 올봄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은 그야말로 대목이었다. 개막 당일에 개막작 ‘시스터’의 공식리뷰를 지역신문에 싣는 ‘영광’을 안았다. 지난해까지 신문에 연재한 영화에세이를 묶어 책을 펴냈고 영화제 비공식 행사로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치료 특강도 열었다.

웃음치료와 영화 강의에 재주가 있다는 소문이 지역에서 나기 시작해 알음알음 강연 요청도 들어온다. 암 환자였던 옛 처지를 생각해 병원의 특강요청은 1순위로 수락한다. 원광대병원, 충남대병원, 서울대병원이 그가 활동하는 주무대다. 입을 크게 벌리고 ‘파아∼’ 하고 웃는 환자들을 보면 영화 ‘패치 아담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지식경제부, 행정안전부, 삼성전자, 농협, 전북은행, 우석대 평생교육원…. 주말마다 전국 기업체, 주요 기관 등을 돌며 특강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일밖에 모르던 승수 씨는 이제 그 누구보다 퇴직 뒤를 기다리고 있다. 일에 미쳐있을 때나 지금이나 뒤에서는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다. 혹자는 “영화 속의 새로운 세상을 보여줘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지만 어떤 이는 “맡은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라며 혀를 찬다. 그런 말이 듣기 싫어 지난해에는 보란 듯이 우체국 고객만족도 평가 도내 1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역시 웃음과 영화로 사람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줄 때 제일 보람을 느낀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는 100여 명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제일 소중하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이던 2012년 4월 29일 전주 최명희문학관 강당의 주인공은 ‘영화를 읽어주는 시골우체국장’이었다.

“이승수입니다. 별명은 똘똘이 스머프이지만 입만 갖고 살진 않습니다. 튼튼한 내면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와 함께하는 한 시간, 영화 속 치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채널A 영상] ‘웃어야 젊어진다’ 황수관 박사의 건강비법

완주=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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