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가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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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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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제갤러리 - 광주비엔날레서 만나는 김수자 영상작품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 선보인 김수자 씨의 ‘앨범: 허드슨 길드’는 미국 뉴욕에 사는 0∼80세 이주민 출신 노인들의 단체 초상을 엮은 영상작품이다. 작가가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에서 각기 다른 삶의 굴곡을 읽을 수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올해 광주비엔날레에 선보인 김수자 씨의 ‘앨범: 허드슨 길드’는 미국 뉴욕에 사는 0∼80세 이주민 출신 노인들의 단체 초상을 엮은 영상작품이다. 작가가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에서 각기 다른 삶의 굴곡을 읽을 수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김수자씨
인간은 맨몸으로 태어나 일생동안 천과 더불어 살아간다. 출생 이후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이불을 덮고 옷을 입는다. 그래서 피륙을 짜는 실의 궤적은 곧 삶의 궤적과도 겹쳐진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손꼽혀온 김수자 씨(55)는 이렇듯 인류가 축적해온 실의 문화를 통해 우리 삶의 면모를 미학적, 철학적으로 사유한 영상작품을 완성했다. 서울 국제갤러리가 마련한 개인전에 선보인 16mm 신작 다큐멘터리 필름 ‘실의 궤적’이다.

그는 이동이 잦은 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국의 마을을 이불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찾아가는 11일간 여정을 기록한 1997년의 영상작품(‘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km’)으로 ‘보따리 작가’란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카이로, 델리, 멕시코시티 등 8개 대도시의 군중 속에서 미동 없이 서있는 작가 자신의 몸을 바늘로 상징화한 비디오 연작(‘바늘여인’)을 발표했고 이번에는 실 잣는 사람들(‘실의 궤적’)의 세계로 몰입했다. 보따리→바늘→실로 진행하는 그의 작업은 삶의 근원을 향해 깊어지는 성찰을 드러낸다.

2012광주비엔날레에선 그의 또 다른 영상 ‘앨범: 허드슨 길드’를 접했다. 약 31분 길이의 작품엔 뉴욕의 허드슨 길드 시니어센터에서 생활하는 60∼80세 이주민 출신 노인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뇌를 다쳐 기억을 잃고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출발한 작품은 노년의 고독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되새기게 한다.

실의 궤적, 삶의 궤적

전통방식으로 실을 잣는 페루 여인의 모습을 담은 ‘실의 궤적’ 1부. 국제갤러리 제공
전통방식으로 실을 잣는 페루 여인의 모습을 담은 ‘실의 궤적’ 1부. 국제갤러리 제공
지난 1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아우른 개인전에선 6부작으로 예정된 ‘실의 궤적’ 중 1, 2부를 볼 수 있다. 전통 방식으로 실을 잣고 레이스 뜨는 행위를 인간 문화의 출발점으로 접근한 작품들이다. 1부 페루, 2부 유럽을 무대로 펼쳐지는 실의 문화는 자연환경, 건축과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별다른 줄거리 없이 20여 분 이어지는 영상에선 마추픽추의 자연과 민속 의상의 문양이, 유럽의 정교한 레이스 문양과 사람의 뼈로 장식된 교회 내부 등이 씨실날실로 직조돼 있다. 직조와 레이스 뜨기 등은 자연과 합일한 여성의 삶이 인공적 건축물의 남성적 형태와 대비를 이룬다. 자연의 흐름과 몸의 흐름이 합치된 영상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만들지 않는 작업을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화려한 색채와 사운드가 교직된 ‘뭄바이: 빨래터’는 새벽의 거리 풍경, 기차 문에 짐짝처럼 매달려가는 사람들을 통해 생활 속에서 발견한 매혹적 아름다움과 철학을 제시한다. 10월 10일까지. 02-735-8449

삶과 죽음을 호명하다

“마리나” “피터” 작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뒤돌아 앉았던 노인은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저마다 개성 있는 표정과 태도로 삶의 주름과 곡절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잠시 앞을 응시하다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렘브란트가 그린 집단 초상화를 현대적으로 옮긴 듯 아무 대사 없이도 인물의 삶과 심리적 상태가 오롯이 느껴지는 영상에 잔잔한 슬픔이 스며있다.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호명하는 듯 느껴지면서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 여기’의 무게를 일깨운다.

이곳저곳을 떠도는 유목민적 삶에서 그가 길어 올린 고요하고 시적인 영상들은 내용에 대한 이해와 상관없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거기서 한발 나가면 자연과 인간, 표면과 이면, 정주와 이주, 음과 양, 공간과 시간의 연관성을 관조하는 사유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바느질과 빨래같이 사소한 일상에서 찾아낸 각 지역의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인류 공통의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킨 작품들은 ‘인간이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과 맞닿아있다.

고미석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김수자#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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