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고 싶다]<2>신안군 자은-암태-팔금-안좌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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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로 어깨동무한 네 섬, 신안의 비단허리띠 같구나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자은도 분계해수욕장. 자은도는 ‘치유의 섬’이다. 푸른 숲, 쪽빛 바다, 청잣빛 하늘. 어딜 둘러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섬 하나에 해수욕장이 무려 64개. 힘들고 머릿속에 쥐가 날 땐 그저 모래밭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면 된다. 스르르 바다 같은 평화가 온다. ‘울고 싶다고/다 울겠는가/반쯤은 눈물을 감추어 두고/누구나 그렇게 살아 가는 것/사는 것이/바다 위의 바위섬처럼/종종 외롭고도/그렇게 지친 일이지만/가끔은/네 어깨와 내 어깨를/가만히 대어보자’(홍수희 ‘바위섬’에서) 신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자은도 분계해수욕장. 자은도는 ‘치유의 섬’이다. 푸른 숲, 쪽빛 바다, 청잣빛 하늘. 어딜 둘러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섬 하나에 해수욕장이 무려 64개. 힘들고 머릿속에 쥐가 날 땐 그저 모래밭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면 된다. 스르르 바다 같은 평화가 온다. ‘울고 싶다고/다 울겠는가/반쯤은 눈물을 감추어 두고/누구나 그렇게 살아 가는 것/사는 것이/바다 위의 바위섬처럼/종종 외롭고도/그렇게 지친 일이지만/가끔은/네 어깨와 내 어깨를/가만히 대어보자’(홍수희 ‘바위섬’에서) 신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 뜬눈 밝혀야 하리

―안도현의 ‘섬’에서
신안의 ‘자은·암태·안좌·팔금도’는 목포 앞바다에 단추처럼 박혀 있다. 4개의 섬은 다리로 이어져 ‘하나의 큰 섬’을 이룬다. 4개 섬이 ‘따로 또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섬이든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철부선을 타고 가면 된다. 뱃길로 25분 거리.

4개 섬은 신안 천사(1004개)섬 중 허리에 해당한다. ‘신안의 비단 허리띠’이다. ‘다이아몬드 제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노른자위다. 자은·암태·안좌·팔금의 모든 길은 서로 이어져 있다.

자은도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섬이다. 우선 풍광이 좋다. 조용히 머리 식히는 데 그만이다. 이미 예술인한옥마을이 들어서 조각가(6명) 도예가(8명) 문학가(15명) 사진작가(7명) 등이 살고 있다. 면전해수욕장 일대엔 마리포사 리조트 공사(2014년까지 70실 규모)가 한창이다. 대지면적 5만5230m²(약 1만6700평)에 요트계류장 수상가옥 해변산책로를 갖출 예정. 두봉산(364m)에 오르면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자은도엔 해수욕장이 무려 64개(신안 전체 500여 개)나 된다. 해수욕장은 남쪽 해변에 줄지어 있다. 이 중에서도 백길, 분계해수욕장이 대표적. 이 두 곳은 병풍처럼 빙 둘러쳐진 숲 생태공원이 그림 같다. 분계해수욕장 ‘여인송(女人松) 숲’은 안좌도의 대리마을 숲과 더불어 2010년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산림청 주최)에서 ‘어울림상’을 받았다.

‘물구나무선 여인의 모습’인 여인송.
‘물구나무선 여인의 모습’인 여인송.
여인송은 ‘나무에 올라가 바다에 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끝내 거꾸로 떨어져 죽은 여인의 전설’이 서린 소나무이다. 마치 ‘벌거벗은 여인이 물구나무서 있는 듯’하다. 수백 년 된 소나무는 몬드리안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 몸매처럼 늘씬하다.

자은도는 땅콩 섬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온 섬이 땅콩 밭이었다. 하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점점 줄다가, 요즘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고품질 다수확 품종으로 바꿔 올 재배면적만 30ha, 내년엔 50ha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팔금도는 천연기념물 326호 ‘검은머리물떼새’ 서식지. 섬 곳곳엔 꾸지뽕(산뽕) 밭(17ha)도 많다. 꾸지뽕은 가시가 길고, 암수그루가 따로 있는 뽕나무. 잎, 열매(오디), 뿌리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고혈압 당뇨 항암작용뿐만 아니라 자궁암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아몬드 제도는 예술의 섬이다. ‘한국의 피카소’ 김환기 화백이 안좌도에서 태어났고, 이웃 암태도 폐교에선 ‘에로스서각박물관’ 공사에 바쁘다. 목공예작품 300여 점과 수석 600여 점이 전시될 예정.

박지도 반월도는 안좌도와 나무다리로 이어진 ‘앙증맞은 좁쌀 섬들’. 박지도(朴只島)는 ‘박씨가 처음 들어와서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재 20여 명의 주민이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반달 모양의 반월도(半月島)는 100여 명의 주민이 김 양식 등 어업을 위주로 하며 산다. ‘안좌도∼(547m)∼박지도∼(915m)∼반월도’는 1462m 거리. 갯벌 위의 나무다리(천사의 다리)가 몽환적이다. 안좌도 바시리마을 언덕엔 푸른 청보리가 하늘거린다. 푸른 양파, 푸른 마늘밭, 푸른 하늘, 푸른 바다가 마치 김환기의 ‘푸른 달’처럼 정겹다.

압해도 천사섬 분재공원엔 봄꽃의 향연
신안 자은·암태·안좌·팔금도에 가려면 반드시 압해도를 거쳐야 한다.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하기 때문. ‘압해도(壓海島)’란 ‘섬의 삼면이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안군 새 청사도 이곳에 있다.

쇼나조각상과 꽃나무가 어우러진 천사분재공원.
쇼나조각상과 꽃나무가 어우러진 천사분재공원.
송공선착장 코앞에는 ‘천사섬 분재공원’이 숨어 있다. 2009년 4월 문을 연 이래 지난해까지 40여만 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찾았을 정도로 입소문이 난 곳. 송공산(230m) 남쪽기슭 10ha(3만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해바다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분재원엔 소나무, 주목, 소사나무, 모과나무, 먼나무, 팽나무, 곰솔, 향나무, 금송, 피라칸사 등 1000여 점의 명품 분재가 전시되고 있다. 요즘엔 명자, 살구, 히어리, 매발톱, 난초, 금낭화, 할미꽃, 은방울꽃 등 봄꽃이 황홀하다.

야외 전시장의 쇼나조각 작품도 볼만하다. 쇼나조각은 아프리카 짐바브웨 조각공동체 ‘텡게넨게’에서 만든 현대조각 작품으로 모두 101점(대형 30, 중형 60, 소형 11점)이다. 짐바브웨는 ‘돌로 지은 집’이란 뜻으로 기원전부터 돌조각 문명으로 이름난 나라. 쇼나는 짐바브웨 인구 70%를 차지하는 부족의 이름이다. 아프리카 원시문명의 풋풋함과 신안 앞바다의 민들레꽃 같은 섬들이 닮았다. 061-240-8778일제 때 바위처럼 뭉쳐 이긴 암태도 소작쟁의

암태도(巖泰島)는 화강암 섬이다. 승봉산(355m)엔 우뚝우뚝 큰 바위가 많다. 예로부터 섬사람들의 기질이 바위를 닮았다. 단결도 바위처럼 굳건했다. 일제강점기의 암태도 소작쟁의(1923∼1924년)가 그 좋은 예다. 오늘날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이 그날의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대지주들의 과다한 소작료(7∼8할) 징수에 대한 소작인들의 생존권싸움’이자 1년간의 치열한 항일 농민항쟁이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하며 불납운동을 했고, 지주들은 일제경찰을 비롯한 관헌들을 등에 업고 소작인들을 위협, 협박, 회유했다.

소작인들은 노인부터 아이 업은 아낙네까지 주민 600명이 배를 타고 목포지청에 달려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항의 농성을 했다. 섬사람들은 일찍부터 깨어 있었다. 그것은 1920년 섬 유지들이 자금을 모아 만든 암태사립학교 교육의 결실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앞장서서 대지주들의 횡포와 일제당국의 편파성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이와 같이 비참한 경우에 빠진 소작인들이 미력의 단결로써 무리(無理)에 반항코자 함은 구사에서 일생을 구하는 것이니 이것을 죄라 하면 무고히 죽고 마는 것이 아니랴. …오늘날까지 소작인단체에서 강포한 행동이 잇단 말을 듣지 못하엿것마는 사법자의 태도를 보면 이것이 엇지 편파 가혹한 처치가 아니랴.’(1924년 9월 9일자)

일제당국은 이 운동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다. 서둘러 대지주들에게 마무리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지주들이 4할 소작료 징수를 받아들였다. 소작인들의 승리였다.

이후 암태도는 다른 섬들의 ‘선망의 섬’이 됐다. 주민들의 단결력은 더욱 철석같아지고, 향학열은 더욱 뜨거워졌다. ‘동리마다 농민야학이 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배우므로 국문편지 한 장씩은 다 볼 줄 알며 쓸 줄도 안다. 다도해 방면 다른 섬에서는 이 섬을 가리켜 이상향이라고 부른다.’(동아일보 1928년 8월 15일자)

안좌도의 땅-바람-바다가 섬소년 김환기를 ‘한국의 피카소’로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저녁에’ 전문

1969년 미국 뉴욕에 살던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위의 시를 보고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국의 산하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친구가 보고 싶고, 정다운 고향냄새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는 커다란 캔버스(가로 172cm×세로 232cm)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찍고 또 찍었다. 결국 그 이듬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걸작을 내놓았다.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과 너와 나의 인연을 그림으로 풀어놓았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그리는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뻐꾸기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한국의 피카소’ 김환기는 ‘섬 소년’ 출신이다.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가 그의 고향. 비록 그의 몸은 도쿄, 파리, 뉴욕에 있어도 그의 마음은 늘 고향을 맴돌았다. 그가 토해낸 색깔(쪽빛, 반물색, 감파랑)과 점·선·면들은 하나같이 따뜻했다. 산잔등에 걸린 푸른 달, 옥양목 빛 달항아리와 ‘산, 새, 사슴, 매화, 여인’에서 모두 조선토종 정서가 물씬 배어났다. 청잣빛 하늘과 동해를 닮은 바다 그리고 낮은 산등성이와 그 위에 뜨고 지는 해와 달. 하나같이 낯익은 풍경들이었다. 그가 왜 한때 ‘조선백자에 미쳐 하루 한 점씩 사들였는지’ 이해가 간다. 그는 글도 잘 썼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내 그림은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글이 막힐 때마다, 백자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

지주 집안의 ‘ㄱ’자형 기와집, 수화 김환기 생가.
지주 집안의 ‘ㄱ’자형 기와집, 수화 김환기 생가.
안좌도 읍동리엔 그의 생가가 오롯이 남아 있다. 1910년 백두산나무로 지었다는 지주집안의 ‘ㄱ’자형 기와집. 곳간, 건넌방, 대청마루, 안방, 정지가 가지런하다. 그의 생가 마루에 앉으면 고은시인의 ‘저녁 무렵’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절하고 싶다/저녁연기/자욱한 먼 마을’. 생가 맞은편 앞집 담벼락 등 동네 곳곳에는 수화의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신안군은 130억 원을 들여 생가 부근 22만1300m² 터에 김환기미술관을 건립 중이다.

수화는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하고 목까지 길어 영락없는 학의 모습이었다. 왕방울 목소리에 악기를 잘 다뤄 멋쟁이로 통했다. 하지만 본인은 ‘내 얼굴이 싫다’며 방에 거울을 두지 않았다. ‘까무잡잡한 피부, 좁은 이마, 작은 코, 작은 입에 광대뼈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 김향안(본명 변동림·1916∼2004)은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여성이었다. 어릴 적부터 삼국지와 구운몽을 통째로 외울 정도로 명석했다. 그의 첫 번째 남편은 소설가 이상(1910∼1937)이었다. 스무 살 때인 1936년 여섯 살 위 이상과 결혼해 딱 넉 달간 같이 살았다. 수화와는 1944년 재혼했다. 김향안 스물일곱, 수화 서른 하나. 수화는 당시 세 딸의 아버지였다. 김향안은 수필가와 화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다가 2004년 눈을 감았다. 그의 소원대로 뉴욕공동묘지 수화 곁에 묻혔다.
신안=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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