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왕오천축국전’ 佛 펠리오 발견, 우리나라에 소유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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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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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Q&A

왕오천축국전 앞 부분.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왕오천축국전 앞 부분.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 왕오천축국전은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문화재 아닌가? 약탈문화재 아닌가.

“아니다. 727년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와 서역 여행을 마친 뒤 중국땅 장안에서 왕오천축국전을 완성했고 그것이 둔황의 막고굴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유권은 없다. 폴 펠리오는 당시 막고굴 관리자로부터 헐값에 이들 고문서를 구입해 프랑스로 보냈다. 약탈에 가까운 구매였지만 어쨌든 돈을 주고 구입했기에 중국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왜 전체를 모두 펼쳐 전시하지 않는가.

“문화재를 빌려올 때는 소장자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 ‘왕오천축국전’을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은 △대여기간은 3개월 △60cm 이상을 전시하지 말 것 등을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조건을 단 것은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다. 1908년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옮겨진 이후 첫 나들이이기 때문에 프랑스 측이 더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10년 12월 14일 한국에 들어온 왕오천축국전은 2011년 3월 17일까지 약 60cm만 펼쳐놓은 채 전시된다.”

― 혜초는 왜 신라에 돌아오지 않았나.

“중국으로 인도로. 8세기 승려들 사이에서는 구법여행의 열풍이 불었다. 열다섯의 젊은 청춘, 혜초도 구법의 꿈을 안고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중국 광저우로 가 거기서 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와 그의 제자 불공을 만났다. 거기서 밀교를 배운 혜초는 스승의 권유에 따라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 혜초는 거기서 불공의 제자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밀교 연구에 빠져든 것이다. 비록 몸은 신라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불교는 당과 인도의 국제감각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늘 신라 땅이 그리웠지만 이미 그에게 국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 펠리오는 어떻게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의 동양학 실력 덕분이다. 폴 펠리오(1878∼1945)는 파리 정치학교와 베트남 하노이 극동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이미 중국과 인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분야에 매진했다. 불교도 공부했으며 구법승과 실크로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한적(漢籍)과 동양어를 공부했다. 1905년 프랑스는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펠리오를 단장으로 임명했다.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위구르어 러시아어에도 능숙한 펠리오. 여기에 해박한 동양학 관련 지식, 동양 문화에 대한 열정 덕분에 그는 한눈에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홈페이지 바로가기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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