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연극女왕]12월… 길해연 “절제된 내면연기 ‘속깊은 배우’”

  • Array
  • 입력 2010년 12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창작극 ‘사랑이 온다’에서 남편의 폭력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절망적 상황을 목도하는 어머니 역으로 12월의 연극여왕에 선정된 길해연 씨. 원대연 기자  eon72@donga.com
창작극 ‘사랑이 온다’에서 남편의 폭력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절망적 상황을 목도하는 어머니 역으로 12월의 연극여왕에 선정된 길해연 씨. 원대연 기자 eon72@donga.com
길해연 씨(46)는 그만한 지명도의 배우로선 드물게 다작(多作)의 여배우다. 올해도 ‘루시드 드림’ ‘꿈속의 꿈’ ‘그대를 속일지라도’ ‘자유종’ ‘33개의 변주곡’ ‘사랑이 온다’ 등 6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연극배우가 보통 작품당 두 달씩 연습을 한다고 하면 1년 내내 쉬지 않고 연기에 매달렸다는 게 된다. 그중 절반은 자기가 선택했지만 절반은 ‘의리’로 출연한 것이다. 연출가와 언제 한번 작업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본도, 배역의 크기도 보지 않고 출연하는 것을 그는 ‘의리연기’라고 불렀다. 이달 초 서강대 메리홀에서 단 닷새만 공연한 ‘사랑이 온다’(배봉기 작·심재찬 연출)도 그렇게 ‘의리연기’를 펼쳤다가 ‘12월의 연극여왕’에 선정되는 기쁨을 안겨준 작품이 됐다.

“심재찬 선생님이 예전부터 ‘너 나랑 작품 하나 같이 할 거 있다’고 말씀하셨던 작품이라 빠질 수 없었죠. 마침 제가 소속된 극단 작은신화에서 준비하던 두 작품과 시간이 겹쳤지만 선약이 우선이란 생각에 출연했는데 뜻밖의 반응에 저도 놀랐어요.”

그는 ‘사랑이 온다’에서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아들이 아비를 닮은 짐승으로 변한 것을 목격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어미 역을 맡아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연기상 최종 후보 4명에도 올랐다. 27일 시상식에서 사회를 본 그는 “윤소정 선생님이 여자연기상을 탈 때는 저 같은 후배들에게 선생님과 같은 나이까지 당당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셨다는 생각에 고맙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83학번인 그는 10대 대학 연극반 출신들로 구성된 극단 ‘작은신화’의 창단멤버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놨다. 1986년 창단된 작은신화는 젊은 연극인들로만 구성된 탓에 초기엔 기성 연극계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았지만 지금은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중견 극단으로 성장했다.

“원래 염세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문학소녀였어요. 우연히 연극반에 들어가긴 했지만 평생 배우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극단 활동도 그냥 같이하는 친구들이 좋아서 한 것이라 2001년 ‘돐날’에 출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극단 작은신화 단원’이라고만 절 소개했지 배우라고 말한 적이 없었어요.”

연극을 만나서 세상을 알게 됐고 인간이 됐다는 그는 배우보다 연극 자체를 더 좋아한다.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자기 배역보다는 전체 연극을 먼저 생각하는 속 깊은 배우로 꼽힌다. 많은 연출가들이 그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깊이의 뒤편에는 두 남자의 죽음이 감춰져 있다. 첫 번째는 극단 작은신화의 대표이자 연출가였던 이유철 씨(고 이근삼 씨의 외아들)의 사고사다. 극단 운영이 너무 힘들어 마지막 공연이란 생각으로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하던 중 이 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단원들은 똘똘 뭉쳐 그를 위한 추모공연을 준비했고 그것이 평생 연극에 대한 의리로 발전했다. 두 번째는 남편의 죽음이다. 2007년 유미리 원작의 ‘물고기 축제’를 공연할 때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숨졌다. 그는 삼일장만 마치고 무대로 돌아왔다. 아들의 관 뚜껑을 앞에 둔 어미 역이었다.

“남편을 잃기 전에도 그 장면을 연기하면서 눈물을 참기 힘들었는데 막상 남편을 잃고 나니까 끝까지 눈물을 참는 그 어미의 절절한 심정이 이해되더라고요. 당시 중3인 아들과 단둘이 남았는데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되자 그 캐릭터가 이해됐어요….”

이후 그의 별명은 ‘힐러리보다 더 바쁜 길러리’가 됐다. 극단 활동에, 대학 강의에, ‘마파도’ 등 영화 출연에, 벌써 3권의 책을 낸 동화작가로서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연기는 더 원숙해졌다는 것이 연극계의 중평이다. “요염한 팜파탈에서 원숙한 노모 역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연극평론가 김미도), “남의 글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배우”(극작가 장성희), “작품 전체의 흐름에 맞춰 절제된 내면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최치림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많은 여배우들이 길 씨를 ‘멘터’로 삼아 조언을 구하는 이유가 절로 이해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