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작정하고 가볍게 만든 법정코미디물 ‘더 디펜더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22일 12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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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지 꽤 됐지만, 2010년 가을은 심하게 말하자면 '최악의 시즌'이다. '죽음의 시즌'이라 말해도 될 것같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새롭게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들을 줄 세워 봤을 때, 시즌1도 채 마치지 못하고 방송을 중단하는 드라마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기준이 드라마의 질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고 컨텐츠로 판매되고 광고를 불러 모으냐는 양적 수치에 달려 있기에, TV네트워크와 케이블 채널의 신속한 '시즌 취소'가 너무 냉정한 게 아닌가 살짝 원망스러울 정도다.

2010년 가을 새로 시작한 시리즈 중에서 이미 취소가 결정된 불운한 드라마들은 FOX의 '론스타', NBC의 '아웃로', ABC의 '더 홀 트루스' 등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드라마보다는 코미디가 강세라 대부분 살아남았고, 미국드라마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굳건하게 지켜온 법정수사물은 2009년 시작한 '굿와이프' 'NCIS: 로스앤젤레스' '로 앤 오더: 로스앤젤레스'를 제외하면 저조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로스트' '히어로즈' 등 음모론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하려는 듯 보였던 '더 이벤트' '루비콘' 등도 초반 관심이 반짝했을 뿐이고, 메인 시즌의 휴지기에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던 '화이트 칼라' '코버트 어페어즈'에 이은 첩보장르 '언더커버스'도 별 재미는 못 봤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CBS의 '더 디펜더스'는 '로 앤 오더: 로스앤젤레스' '블루블러드'와 함께 무사히 시즌1을 방영할 수 있게 된 법정수사물 장르의 생존자들 중 하나다. 단, 생존자라 해도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니까, '턱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더 디펜더스\' 포스터. "라스베가스에서는 정의도 뜨겁다"라는 광고 문구가 곁들여졌다. 두 주인공 사이에는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여자가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한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더 디펜더스\' 포스터. "라스베가스에서는 정의도 뜨겁다"라는 광고 문구가 곁들여졌다. 두 주인공 사이에는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여자가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한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 라스베가스의 화려함과 가벼움을 빼닮은 변호사 짝패 니키와 피트

'더 디펜더스'는 어제 일을 묻지 않은 오늘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펼쳐지는 법정코미디드라마다. 제목 '더 디펜더스'는 피고 측 변호사를 일컫는 말이며, 드라마의 주인공인 닉 모렐리(짐 벨루시)와 피트 케즈메릭(제리 오코넬)의 직업이기도 하다.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호텔이 즐비한 스트립과는 대조적인 사막 한가운데에, 파트너인 두 사람은 'The Defenders'라고 쓰여진 화려한 옥외광고판을 세운다. 두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번 덤벼봐!"라고 외치는 듯한 유쾌한 광고판이다.

'모렐리 & 캐즈메릭'이라는 간판을 단 그들의 사무실도 라스베가스의 일부분인 듯 화려하다.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먼, 검은색 페인트로 칠한 벽에는 흰색 프레임이 '안나수이'의 거울 마냥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며(그러나 고풍스럽지는 않다) 둘러져 있고, 리셉션 데스크도 부띠끄 성형외과인 양 최신유행을 따른다.

닉과 피트라는 콤비도 그렇다. 둘중 연장자인 두툼한 풍채의 닉은 라스베가스의 과묵한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고, 날렵한 맵시를 뽐내는 플레이보이 피트는 화려한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짝패로서 두 사람은 잘 어울리고 죽도 잘 맞는다. 자세히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을 두 사람은 척하면 삼천리인 경우가 많다. 심성도 심각하기보다는 유쾌하고 진실되며 도전정신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결백하다고 믿는 의뢰인(법정에서는 피고인)과 함께라면 결과는 뒷전에 두고 도전해보는 순수함도 엿보인다.

이렇게 조금은 별난 변호사들인지라, 재판 준비과정도 여느 법정물과는 다르다. 어쩌면 '수면상태'의 미국경제를 반영해서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의 일환일지도 모르겠지만, 닉과 피트는 현장형이다. 수완 좋은 조사원을 수하에 두어 부리기보다는, 전직 스트립 댄서 출신인 신입변호사 리사를 포함한 삼총사가 직접 현장에 출동해 사건을 재연하고 주변인을 탐문하는 등 직접 발로 뛰고 문을 두드리고, 거기서 피고인에게 도움이 될 진실을 얻어낸다.

의뢰가 들어오는 사건은 라스베가스라는 지역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오클라호마에서 로또에 당첨된 남자가 카지노를 전전하다 빈털터리가 되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대출을 받았다가 고소를 당한 경우나 스트립클럽 댄서에게 씌워진 매춘혐의가 전자에 속한다면, 운전 중 부주의로 조깅하던 사람을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싱글맘 사건, 권총강도사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흑인 피고인과 백인 증인 사이의 인종주의와 위증으로 혐의가 성립된 사건은 여느 법정물에서 종종 보아왔던 소재처럼 보인다. 사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울 때가 있다. 법정수사물이라는 장르에 한쪽 발을 걸친 TV시리즈는 이미 많으니, 기왕 라스베가스에 자리 잡았다면 그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는 사건들이 좀 더 많이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람 탓이다.

사막 한가운데 높게 새워진 닉과 피트의 광고판. 이 장면에서처럼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유쾌하고 지칠 줄 모른다.
사막 한가운데 높게 새워진 닉과 피트의 광고판. 이 장면에서처럼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유쾌하고 지칠 줄 모른다.

▶ 리얼스토리에서 소재를 가져온 드라마 '더 디펜더스'

'더 디펜더스'가 만들어진 뒷이야기는 "Based on true story"(실화에 근거함)라는 수식으로 시작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비슷하다.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 재벌들이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을 맡으며 이름을 떨친 마이클 크리스탈리와 마크 새기스라는 현업 변호사들의 스토리가 '더 디펜더스'의 바탕이 됐다.

우연히도 둘 다 뉴욕 주 시라큐스 출신이며, 둘 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 남다른 인연을 자랑한다는 크리스탈리와 새기스는 '더 디펜더스' 이전에도 다른 네트워크 및 채널에서 두 사람의 파트너십을 방송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었다. 이들의 제안과 '더 디펜더스'의 제안이 달랐던 점은 다른 제안들은 리얼리티 TV쇼로 제작하려는 것이었으나, '더 디펜더스'는 두 사람의 캐릭터를 가지고 와서 드라마로 꾸미려 했다는 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드라마와 실제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포스트는 "부인과는 별거 중이며 아들 하나를 둔 닉의 모델이 된 크리스탈리는 실제로는 두 아들을 두었으며 사랑하는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스튜어디스, 지방 검사, 의뢰인 등 가리지 않고 매력적인 여자에게 뛰어드는 피트의 모델이 된 새기스는 20일 뒤면 결혼한다"고 전하고 있다.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크리스탈리와 새기스는 '더 디펜더스'의 기술자문이자 제작컨설턴트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피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제리 오코넬은 캐스팅 당시 로스쿨에 다니고 있었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새기스의 뒤를 그림자처럼 좇으며 법정으로 현장학습을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 평가는 저조해도, 살아남았으니 일단은 괜찮아

사실 '더 디펜더스'에 쏟아진 관심이나 평가는 기대 이하, 평균 이하에 가깝다. 미국 연예전문지 버라이어티는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은, 라스베가스에 남는다"는 오래된 농담을 인용해서, 참신함도 재미도 없는 드라마를 전국으로 방송해야겠냐고 비꼬았다. 일간지 LA타임즈는 '더 디펜더스'라는 같은 제목의 1950년대 드라마의 명성이 더럽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일부는 '더 홀 트루쓰' '아웃로' 등 이미 시즌이 취소된 불운한 드라마들과 비교하며, '더 디펜더스'가 그 둘과 비교해 나은 점이 없으므로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더 디펜더스'가 끝까지 살아남았는지는 2011년 가을 시즌2 방영여부를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합격점을 받고 있기에 시즌 취소 발표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싶다. 미국드라마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법정수사물을 즐겨 본 나이기에 '더 디펜더스'를 두둔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미국 평론가들은 닉 모렐리를 연기하는 중견 연기자 "짐 벨루시 때문에 참고 본다"고 하지만, 나는 제리 오코넬 쪽에 호감이 간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위증을 하는 백인 증인에게 다가가 윽박지르듯이 "제발 진실을 말하라"고 했던 장면이다. 피고 측 변호인과 검사 측 증인은 재판 전에 접촉하면 안 되기에 그 사건이 빌미가 되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하고 퍽버디(Fuck Buddy: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잠자리만 함께하는 사이)였던 검사 메레디스 크레이머(나탈리 지아)와도 헤어지지만, 수임료를 한푼도 챙기지 못하더라도 맡은 사건에서는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보였다고나 할까.

아마 로스쿨에서 열심히 진땀빼고 있는 친구는 이런 내 글을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현업에 종사하는 많은 법조인들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할 것 같다. 그래도 작정하고 가볍게 만든 드라마니까, 그런 판타지 정도는 허락하고 싶다.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가 누구에게나 공짜로 선물하는 것이 바로 판타지니까.

안현진 잡식성 미드마니아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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