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황윤정]충무로 백여우(百女優)-조용원과 강수연①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7일 15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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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닮았으나 다른 길 택한, 조용원과 강수연

● 수재형 여배우 '조용원'을 기억하시나요?
● 1980년대의 두 여배우 조용원과 강수연 이야기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용원은 이후 한국에 영화 관련 벤처경영인으로 복귀한다(동아일보 DB)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용원은 이후 한국에 영화 관련 벤처경영인으로 복귀한다(동아일보 DB)
타임머신을 타고 정확히 25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때는 1985년, 당시의 한국영화 속에는 두 명의 걸출한 여배우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19세의 동갑내기 여고생인 그녀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분명히 다른 색깔로 관객들에게 어필했고, 그만큼 이후의 행보와 인생 여정 또한 확연하게 달랐다.

'조용원 vs 강수연'

당시에는 조금은 냉정하게 말해 강수연보다는 조용원이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혹자는 조용원이 계속 활동을 했다면, 강수연이 그렇게 주목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2010년이 된 오늘날, 충무로의 스크린 속에 강수연은 있고 조용원은 없다. 과연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 추억의 하이틴 스타, 수재형 여배우

1980년대 가장 돋보였던 여배우 조용원(동아일보 DB)
1980년대 가장 돋보였던 여배우 조용원(동아일보 DB)
1981년,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미스 롯데'에 당선되면서 연예계에 데뷔한 조용원은 TV와 CF를 통해, 이보다 더 순수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배우는 없다고 할 정도로, 청순하면서도 가녀린 이미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1983년, 고영남 감독의 '내가 마지막 본 흥남'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한 이후, '신입사원 얄개'(1983), '열아홉 살의 가을'(1983),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 '불타는 신록'(1984) 등을 통해 어느 앵글로 잡아도 빛나는 신비한 마력으로 뭇 남성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1984년 하명중 감독의 '땡볕'을 통해 다른 하이틴 스타들과는 완전히 차별화하면서 연기력을 활짝 꽃 피우는 계기를 마련한다.

'땡볕'에서 조용원은 일제 강점기의 순진한 아낙네 '순이'라는 토속적이면서도 강인한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고등학생의 연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을 펼쳤다. 이를 통해 그녀는 대종상, 영화평론가협회상,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신인상 등 각종 영화상을 석권하고, 베를린 영화제 본선까지 진출해 호평을 받으며 한국의 대표 여배우가 되는 듯 했다.

게다가 할리우드처럼 명문대 출신의 브룩쉴즈나 조디포스터 같은 수재형 배우가 우리나라에는 없을 줄 알았던 1980년대, 그녀의 등장은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녀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수석 합격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여배우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에 충분했다.

■ 1980년대 비운의 하이틴 스타, 여배우

그런데 인기절정을 달리던 조용원이 학업과 연기활동을 병행하며 바쁜 생활을 하던 중 뜻밖의 사고에 직면하게 된다. 1987년 11월, 꽃다운 스물 한 살이란 나이에 고속도로에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사고에서 그녀는 목소리 결절과 함께 여배우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치료를 받았지만 당시의 성형기술로는 어쩔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5년간 14편의 작품만을 남겨 두고 홀연히 은막을 떠나게 된다. 사고이후의 온갖 악성 루머에도 굴하지 않고 중대 영화과를 수석 졸업하더니 일본으로 홀연히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이후 앳되고 가녀린 이미지와 달리 당찼던 그녀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고 동경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한다. 자신에게 닥친 비운과 삶의 역경에 도전적으로 대처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보여주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던 것.

■ 영화학 전공, 영화 주간지 창간…영원한 영화인

배우 조용원은 데뷔 초부터 이지적이고 청순한 매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배우 조용원은 데뷔 초부터 이지적이고 청순한 매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 그녀가 돌아왔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 '땡볕'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뜻밖의 교통사고로 고통과 좌절을 겪어야했던 그녀가 6년이란 지난한 세월을 이겨내고 30대의 성숙한 여인이 되어, 돌아와서 내민 명함은 '벤처사업가'였다.

EBS에서 '시네마 천국'을 차분히 진행하면서 '극단 원'을 창단하여 뮤지컬 공연 및 연예사업을 시작하더니, '원앤원픽쳐스'란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 영화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영화주간지 '시네버스'를 발행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 영화 관련 정보 사이트와 일본어 교육 사이트를 운영하는 등 '손정의 펀드'에서 1호 투자를 받아낸 문화벤처기업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일 때도 벤처사업가일 때에도 줄곧 '영화'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영화인으로 남았다. 또한 배우로서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국내 영화 몇 편에 특별 출연을 하기도 했고, 2003년에는 '포스트 왕자웨이'로 불리는 유릭와이 감독의 중국영화 '올 투머로우스 파티(All Tomorrow's Party, 국내타이틀 '명일천애')에 출연, 2050년 무정부 국가 상태인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30대 여자 주인공 역을 맡아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다.

■ 여전히 보고 싶다, 조! 용! 원!

현재, 그녀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때문에 결국 폐간에 이르게 되었던 '시네버스' 등의 모든 사업체를 정리하고 유학생활을 했던 일본에 가 있다고 한다.

필자는 1990년대 후반에 그녀와 사석에서 수차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영화에 대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굉장히 열정적이었고, 열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녀는 연기에 대해서 "오드리 햅번과 같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또 "연기생활의 바탕이 되는 힘은 실생활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부딪히는 많은 경험들이 연기생활의 바탕이 되는 힘이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슴푸레 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특별한 인생 역정은, 그녀가 다시 연기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 위대한 연기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스크린의 꽃'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가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해 본다. 미처 꽃피우지도 못했던 이지적이면서도 야무진 그녀의 연기, 그리고 실제 경험이 묻어나는, 농익은 인생의 깊이가 담긴 그녀의 연기를 진정으로 다시 보고 싶다.

황윤정 / 영화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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