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정주현]‘유령작가’ 정통 스릴러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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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일 14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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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유령(The Ghost)’이 원작으로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신작 \'유령작가\'. 이완 맥그리거(우), 피어스 브로스넌(좌)이 각각 유령작가와 전 영국 수상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유령(The Ghost)’이 원작으로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신작 \'유령작가\'. 이완 맥그리거(우), 피어스 브로스넌(좌)이 각각 유령작가와 전 영국 수상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최근 영화들을 살펴보면 이전엔 보지 못했던 갖가지 신종 하이브리드형 장르가 자주 눈에 띈다. SF 서스펜스 판타지라든가, 하드코어 액션 스릴러라든가, 로맨틱 휴먼 드라마라든가 하는. 물론 한 영화가 꼭 한 장르에 머물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종종 주의를 분산시켜 긴장감을 떨어뜨리게도 하고,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결국에는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도 한다.

이번 주 개봉하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유령작가'는 '마치 정통 스릴러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다. 피를 튀기는 잔혹함이나 심장을 벌렁거리게 하는 깜짝 사운드는 없다. 불필요한 장신구 같은 곁다리 설정도 없다. 오로지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건 전개로 끝까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잘 짜인 각본 하나만으로 관객을 흡입하는, 스릴러의 정석과 같은 작품이다.

▶ 자살인 줄 알았던 전임자의 죽음, 서서히 드러나는 음모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목마저도 스릴러 영화의 정석 같다) 이 작품은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 즉 한 대필작가의 이야기다. 전 영국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대필하던 유령작가가 갑자기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새로운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자서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급히 런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다. 단순한 대필인 줄 알았던 자서전의 뒤에는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고, 이 음모의 단서를 쫓는 그에게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던 직감은 현실이 되고 만다.

그가 받아 든 전임자의 초고는 한심할 정도로 진부하다. '저는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밑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는 식의 문구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유명 수상의 자서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식상한 초고를 그는 대대적으로 손보기로 한다. 이때만 해도, 이 상투적인 표현 속에 사건을 푸는 열쇠가 들어 있을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서전의 핵심이 가슴에 있다고 믿는 유령작가는 랭의 인간적인 면을 취재하기 위해 인터뷰를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랭의 말에 부인 루스와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둘의 이야기가 미묘하게 어긋남을 발견한다. 그의 의심이, 시작된다.

전임자의 죽음으로 전 영국 총리 아담 랭의 자서전을 맡게 된 유령작가는 그의 자서전 작업을 하면서 어떤 음모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전임자의 죽음으로 전 영국 총리 아담 랭의 자서전을 맡게 된 유령작가는 그의 자서전 작업을 하면서 어떤 음모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랭의 집은 미국의 한 시골 섬에 자리 잡고 있다. 육지로 나가기 위해선 배를 타야 한다. 섬의 풍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량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잿빛 파도뿐이고, 이웃들의 집은 인구 밀도 제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듬성듬성 있다. 외부 세계와 철저히 고립된 듯한 이곳은 랭의 현재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 그는 젊고 매력적인 영국 총리로 세계를 뒤흔들만한 권력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범으로 기소될 처지에 놓였고, 심지어 한때 그가 주인이었던 다우닝가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섬의 분위기만큼이나 집안의 분위기도 기괴하다. 뛰어난 엘리트이자 남편에게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아내 루스 랭, 그가 정부(情婦)라 의심하는 여비서, 소규모의 보좌진, 그리고 집안의 가사를 담당하는 말 없는 이들. 이들은 무미건조하고 직업적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각자의 비밀을 지닌 것처럼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믿는 듯, 또는 믿지 않는 듯한 이들이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은 집 안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흐르게 한다.

그 속에 홀로 던져진 유령작가. 그가 사건의 단서를 하나씩 파헤쳐갈 때마다 그의 고립은 깊어진다. 물리적인 고립이 주는 외로움 못지않게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정신적인 고독감 역시 만만치 않다. 전임자의 죽음이 타살임을 직감하면서 그에게도 공포감이 밀려오지만, 상황은 그가 그만둘 틈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그리고 치밀하게 전개된다.

'섹스앤더시티' 시리즈에서 화끈한 사만다로 관객들을 매혹시켰던 킴 캐트럴은 '유령작가'에서는 아담 랭의 수석 비서인 아멜리아로 변신해 차갑고도 지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섹스앤더시티' 시리즈에서 화끈한 사만다로 관객들을 매혹시켰던 킴 캐트럴은 '유령작가'에서는 아담 랭의 수석 비서인 아멜리아로 변신해 차갑고도 지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 '천재' 폴란스키 감독의 파란만장한 일생 투영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여덟이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려내는 그의 미적 감각은 너무나 젊고, 이야기의 내적 구성력은 단단하다. 그의 빛나는 연출력은 동시대 어느 감독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 개인적인 삶에는 평생 불미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영화적으로 볼 때 신은 분명히 그에게 많은 이들이 시기할 수밖에 없는 재능을 주셨다.

사실 그의 개인적인 삶을 작품세계와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2차 세계 대전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어린아이였던 그는 유태인 게토를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공업학교에 다니다 그만두었으며, 처음 영화에 입문한 것은 연기를 통해서였다.

폴란드, 영국, 프랑스 등에서 영화를 만들며 명성을 얻은 그는 1968년 '악마의 씨(Rosemary's Baby)'라는 사이코 스릴러 영화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 임신 8개월이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었고, 그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1974년 다시 '차이나 타운'이라는 영화로 할리우드에 복귀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가 13살 소녀를 강간한 혐의를 받고 미국에서 도망을 쳤다. 그리고 현재까지 미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2003년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을 때에도, 친구인 해리슨 포드가 트로피를 프랑스로 가져다줄 때까지 시상식 후 5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할리우드로부터 교만한 독재자라는 비난을 수도 없이 들었고 온갖 구설수에도 끊임없이 시달렸다. 아카데미와 칸을 포함해 전 세계 영화제에서 53개의 상을 받은 천재감독이지만 평생을 불행과 사건·사고에 시달렸다. 그가 비극과 스릴러에 유독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굴곡 많은 인생이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려내는 통찰력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유령작가'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
영화 '유령작가'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


▶ 진실을 파헤칠 유일한 목격자는 유령

나는 당신의 유령입니다(I'm your ghost). 자신을 이렇게 밖에 소개할 수 없는 유령작가는 그 누구도 이름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알아서도 안 되는 (실제로 영화에는 그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처지는 사건의 본질에 가장 깊숙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유령작가가 배후를 알 수 없는 살해의 위협 속에서 하나씩 진실의 퍼즐을 맞추어 가던 어느 날, 랭은 그가 재임 시 지지했던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한 남자에 의해 피격된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사건은 일순간에 덮이는 듯 보인다. 자서전 판매로 생길 손익계산에 머리를 굴리던 출판사에도, 그와의 관계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또 다른 거대한 조직에도, 비서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하던 아내에게도, 정치인의 책임에 대한 본보기를 만드는 것이 껄끄러웠던 정치권에도, 그의 죽음은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랭의 사후 자서전 출판 기념회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바로 전임자가 남겨놓은 사건의 단서는 서문(beginning)이 아니라 서문들(beginnings)에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놀라운 결말은 이 마지막 5분 안에 함축되어 있다. 아아, 유령작가가 이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정주현/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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