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본 조선왕조실록]<3>세종시대 大路 너비는 약 17m, 도시계획따라 집 헐고 길 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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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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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발전은 물자 수송과 사람의 이동을 편리하게 했다. 이제는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국의 모든 지역을 반나절이면 갈 수 있다. 자동차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기원전(BC) 312년 로마의 아피아가도를 시작으로 도로는 발전했다. 로마는 효율성을 위해 도로를 직선으로 건설했다. 이 때문에 사유지와 기존 건물을 통과하는 문제가 생겼다. 조선시대에도 토지보상 등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조선의 도로 정책은 태조 태종 세종 등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도로 건설, 관리, 노폭까지 규정했다. 세종 대인 1426년 서울을 관할하는 관청인 한성부는 중국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인 ‘주례’에 따라 도성 내의 큰 길을 ‘일곱 수레바퀴’로, 중간 도로는 두 수레바퀴로, 작은 길은 한 수레바퀴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경국대전에는 서울의 도로를 대로, 중로, 소로로 분류하고 노폭은 영조척(30.65cm) 단위로 소로 11척(약 3m), 중로 16척(약 5m), 대로 56척(약 17m)으로 규정했다.

이 도로들은 빈 공간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세종은 이러한 도로 건설은 도시 재정비 성격이 있다고 보고 인구 및 토지 등을 관리하는 호조와 산림 및 공장 등을 맡았던 공조가 협의하도록 했다. 공간과 교통량 등을 감안해 도로를 확장하도록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도로 건설에 따른 토지보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세종 당시 소방 기능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에서는 도로를 넓히기 위해 가까운 집들을 헐었다. 1428년에 종1품 벼슬인 찬성을 지냈던 권진은 세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세종은 ‘인가를 헐다 보면 반드시 소송하는 이가 있을 테니 시간을 두고 진행하도록’ 명했다. 문제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고생하는 백성을 배려한 사례도 있다. 정조 대인 1777년 신천교와 도로를 연결하는 공사가 있었다. 정조는 공사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해 규모를 줄이도록 직접 포고문을 내렸다. 노동력 동원과 사고의 발생을 염려해 필수 공사 이외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태식 한양대 건설환경시스템공학과 교수 (건설문화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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