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장금이’와 ‘연생이’ 사이에 놓인 ‘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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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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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감독의 신작 '동이', '대장금'과 비교하니

이병훈 감독의 신작 \'동이\'에서 숙빈 최씨(동이) 역을 맡은 한효주. 사진제공 MBC
이병훈 감독의 신작 \'동이\'에서 숙빈 최씨(동이) 역을 맡은 한효주. 사진제공 MBC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운명이다. 봉건적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천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자신감으로 위풍당당하던 소녀.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항하던 아버지와 오빠를 동시에 잃은 뒤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자신의 운명과 당당히 맞서 '천인의 딸'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스스로 '빛'이 된다. 평범한 소녀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일 듯한 시련을 극복하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극한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의 소재로 제법 잘 어울린다.

그러나 아무리 흥미로운 내용이라 할지라도 정형화된 틀을 그대로 답습하는 순간 식상해진다. 천인의 딸이 봉건적 신분 질서의 벽을 뛰어 넘어 왕비가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는 매우 흥미로우나 '성공'이라는 예정된 결말을 향한 시련과 위기의 과정이 틀에 박히는 순간 식상한 이야기로 전락한다는 양가성 때문이다. 성공 스토리는 대부분 특유의 영민함을 가지고 태어난 미천한 신분의 인물이 출생의 한계에서 비롯한 시련을 극복하고 타고난 재능과 주변 인물의 도움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천인 출신의 무수리로 훗날 숙종의 후궁이 된 뒤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린 숙빈 최씨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MBC 창사49주년 특별기획드라마 '동이'(김이영 극본, 이병훈 연출)가 흥미로우면서도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성공 스토리'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새벽 호숫가에서 사헌부 대사헌이 살해당하는 정치적 사건, 천인 마을과 반가 마을의 아이들이 이어달리기 시합을 하는 일상의 모습을 연속적으로 구성한 도입부는 긴박함과 역동성을 담보하면서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잘 난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정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별로 상관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사헌부 대사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어린 소녀 동이(김유정 분)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 다른 시대를 살다간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여성, 장금이와 동이

2003년 방영된 '대장금'에서 장금이는 평민 출신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최초의 여자 어의(御醫)가 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3년 방영된 '대장금'에서 장금이는 평민 출신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최초의 여자 어의(御醫)가 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나가는 도인(道人)에 의해 어린 소녀의 운명이 예고되고, 세상에 대한 어린 소녀의 끊임없는 호기심이 부모를 죽음으로 내몰며, 부모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소녀가 특유의 영민함으로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동이의 성장 과정과 성공 스토리!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만약 '대장금'을 열심히 본 사람이라면 장금이(이영애)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천인들의 비밀 결사체가 세도가들의 권력 쟁탈전에 휘말려 와해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천애고아가 된 동이의 신세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 '군관'과 '수라간 궁녀'라는 신분을 숨기며 살던 부모의 죽음 이후 천애고아가 된 장금이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어린 소녀의 가혹한 운명은 동이와 장금이의 영특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출신 성분이나 성공의 종착점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성공 스토리의 매력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그래서 천인 출신의 동이가 공식적으로 숙종의 후궁이 되고, 평민 출신의 장금이가 비공식적으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최초의 여자 어의(御醫)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박감과 역동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이'의 도입부에서 보여준 동이의 시련과 위기가 이미 '대장금'에서 보았던 장금이가 겪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旣示感)을 유발하면서 드라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아무리 '왕비'와 '여의(女醫)'로 차별화된 인생이라 하더라도 동이와 장금이는 다른 시대를 살다간,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여성이라 단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주체성 없는 동이, 장금이보다 연생이 떠올라

장금이와 같이 수라간에서 생활한 궁녀 연생은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종의 후궁이 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장금이와 같이 수라간에서 생활한 궁녀 연생은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종의 후궁이 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연출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이'와 '대장금'을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동이와 장금이는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출생과 성장 과정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운 여성들이다. '천인'이나 '평민' 출신의 여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봉건적 신분 질서가 유지되던 조선 시대의 특징이다. 그런 만큼 단 한 줄로 남겨진 인물의 삶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만약 작가와 연출자의 창의적인 상상력이 아니었다면, '대장금'의 장금이가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2000년대 대한민국 여성의 역할 모델(role model)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동이'의 동이는 '대장금'의 장금이와 상황이 다르다. 조선왕조 21대 임금인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소령원의 비문에 새겨진 "빈의 성은 최씨이고, 그 조상은 해주 사람이다"라는 정보 외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영조가 천인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 생모 숙빈 최씨의 영향이었다는 것도 추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숙빈 최씨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이 무한대로 발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숙빈 최씨를 천인들의 비밀 결사체인 '검계' 수장 최효원(천호진)의 딸이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궁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는 궁녀로 설정한 것은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동이'는 이 지점에서 '대장금'과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선상에 놓인다. '대장금'의 장금이가 연생이(박은혜)와 같은 수라간 출신의 궁녀임에도 불구하고 연생이와 달리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음식'과 '의술'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숙빈 최씨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무수리 출신이라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동이'는 '대장금'에서 중종의 승은을 입은 수라간 궁녀로 설정된 연생이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래서 '대장금'과 '동이'를 통해 서로 다른 시대를 살다간 같은 운명의 여성으로 설정된 동이가 장금이의 자의식과 주체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연생이와 같은 유형의 인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이가 장금이처럼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2000년대의 대한민국 시청자들에게 울림을 주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동이'는 '대장금'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을까

'동이'가 매력적인 새로운 유형의 역사드라마로 자리매김하느냐 여부는 조선시대 음악과 무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동이가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형형색색의 풍등과 폭죽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영상과 '더 좋은 세상'을 꿈꾸었던 천인들의 결사체인 '검계'의 수장 최효원과 당대 권력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남인'의 수장 오태석(정동환) 간의 두뇌 싸움을 중심으로 한 박진감 넘치는 사건으로 구성된 도입부는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는데 한계를 보였다.

게다가 봉건적 신분 질서가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시체 부검의 '오작인'이라는 천민 신분으로 가히 혁명적 발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비밀 결사체를 만들어 진두지휘하던 최효원이 한 번만이라도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고 싶은 마음에 양반가 혼사의 문안비를 자처했다가 위험에 빠진 딸 동이를 구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한다는 작위적인 극적 상황도 시청자의 공감대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동이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서곡을 알리는 이 상황이 만약 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강조한 것이라면 최효원은 비밀 결사체의 수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고, 어린 소녀의 가혹한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계급 갈등을 도구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이'의 도입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시청자들이 이미 '동이'의 성공 스토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시련과 위기 그리고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는 과정이 기존의 성공 스토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와 오빠가 꿈꾸었던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동이의 주체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동이'는 '대장금'의 그늘에 가려 빛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동이'를 '대장금'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작가와 연출자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총명함으로 세상과 맞서지만, 특유의 호기심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가 혈육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어린 소녀의 성장담이자 성공 스토리라는 점에서 '동이'는 숙명적으로 '대장금'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오빠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장악원의 노비가 되어 궁에 들어간 어린 소녀 동이가 아리따운 처녀 동이(한효주)로 성장하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여주지 않은 도입부는 동이가 장금이가 아닌 연생이에 가까운 인물로 보이게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드라마 초반이다. '허준' '상도' '대장금' '이산' 등을 연출하며 '이병훈표 사극'을 만들어낸 이 감독이 그릴 동이의 앞날이 궁금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동영상 = 드라마 ‘동이’ 주인공 한효주 “포스트 이영애 욕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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