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최영일]韓中 잇는 아시아의 줄리 델피, ‘호우시절’ 고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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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4일 10시 10분


동양판 비포 더 선라이즈를 연상시키는 영화 ‘호우시절’
동양판 비포 더 선라이즈를 연상시키는 영화 ‘호우시절’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이 신작을 발표했다. 추석이 지난 10월8일 개봉한 '호우시절'이다.

주연은 정우성과 고원원(高圓圓). 정우성이야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지만 중국 본토 출신의 배우 고원원은 정체를 궁금해 하는 관객이 많을 듯싶다. 1979년생으로 이미 서른 살이 된 고원원은 북경출신으로 북경공업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98년 '스파이시 러브 수프'에 주연으로 화려하게 데뷔했고 2001년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걸작 '북경자전거'에 출연하여 국제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호우시절'로 열 번째 작품에 출연하지만 아직까지도 '중국영화'는 주로 '홍콩영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 시장 탓에 별로 알려진 바 없었던 편이다.

고원원이 정우성과 짝을 이뤄 '호우시절'을 찍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허진호 감독은 쓰촨성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랑해 청두'를 연출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조선족 록스타로 유명한 최건이 참여했다. 최건은 영화연출에도 관심이 많아 '베이징 녀석들'을 만드는 등 중국영화 6세대 감독들과 관계가 깊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 남주인공과 중국 여주인공이 만나는 '호우시절'이 나온 것이다.

‘호우시절’ 정우성과 고원원
‘호우시절’ 정우성과 고원원
● '사랑해 청두' 연출 중이던 허진호 감독

그동안 한국영화에 나온 중국 여배우는 '조폭 마누라2'의 장쯔이, '조폭 마누라3'의 서기 등 적잖이 있었지만 최고의 연기를 펼쳤던 배우는 지금까지는 장백지로 기억된다.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과 연기는 최민식의 양아치 연기와 앙상블을 이루어 관객들의 눈물을 펑펑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새롭게 우리 영화관객 앞에 나타난 고원원은 장백지의 이미지를 넘어설 것인가?

'호우시절'도 쓰촨성에 있는 도시 청두가 배경이다. 두 남녀는 중국시인 두보와 관련된 장소인 두보초당과 주변 대나무 숲, 그리고 시내를 돌며 며칠간의 만남을 누린다.

정우성이 분한 박동하는 건설 중장비 회사의 팀장으로 며칠 간 중국출장 중이다. 두보초당을 어슬렁거리던 중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한 무리의 관광객이 있었고, 여행 가이드를 하는 여성 메이는 자신의 미국 유학시절 친구였다. 일상인이 꿈에 그리는 가장 극적인 만남이다. 오랜만에 우연히 재회한 이들은 잠시의 데이트를 즐기며 미국 유학시절 이야기를 나눈다. 동하는 예전에 메이에게 자전거 타기를 가르쳐준 에피소드며 첫 키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만 메이는 자신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고 대답하며 둘 사이의 첫 키스는 금시초문인 눈치. 둘의 기억은 서로 다르고 아쉽게도 동하의 귀국시간이 다가와 버렸다. 동하가 메이에게 묻는다.

"나, 하루만 더 있다가 갈까?"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어렵지 않다. 지난 시간과 둘의 관계에 대한 남녀 간 기억의 차이라는 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이 떠오른다. 사실 사랑의 시작과 끝에 대해 '객관적'인 기록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보는 주관적 기억과 세월의 덧칠일 것이다. 그런데 이 '호우시절'을 보면서 연상되는 영화가 있었으니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셋'이었다,

● 호우시절과 겹치는 '비포 선셋'

'비포 선셋'은 이 작품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다. 2004년 '비포 선셋'이 개봉되기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비포 선라이즈'와 짝을 이루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유럽기차여행을 하던 20대 청춘 남녀가 우연히 마주친다.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미국청년과 유럽 여대생이다. 이들은 며칠 간 함께 여행하며 호감을 쌓는다. 유럽도시를 돌며 수다를 떨고 서로를 알아가며 감정도 깊어진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이들은 헤어져야 하고 6개월 후에 만나기로 기약한 채 서로의 길을 간다. 9년 후 만들어진 '비포 선셋'은 이 두 남녀의 이별 이후를 애타게 궁금해 하던 관객을 위한 일종의 에필로그다. 그런데 젊음과 여행의 낭만으로 그득하던 전작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79분의 짧은 런닝타임 동안 카메라는 거의 실시간 그대로 둘의 짧은 데이트를 포착한다. 청춘기를 벗어나 중년으로 향하는 두 주인공은 더 이상 풋풋하지 않으며 삶의 풍파에 찌든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중요한 대목은 제시가 9년 전 이별 때 그들이 나눴던 새벽의 사랑을 언급하자 셀린느는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셀린느는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좋아하게 되었지만 깊은 관계는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제시는 혼란스럽다. 어떻게 그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지? 서점에서 거리로, 카페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들은 셀린느의 집까지 동행한다. 셀린느는 통기타를 치며 자작곡을 불러준다. 그리고 제시에게 걱정하듯 말한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지금 나가야해."

제시는 다시 비행기에 올랐을까, 아니면 좀더 셀린느의 곁에 남았을까? 9년 전의 '해 떠오르기 전'처럼 이 '해 지기 전'은 이렇게 필름을 끊듯 막을 내린다. 이제 '호우시절'이 왜 바로 '비포 선셋'을 연상시켰는지 이해될 것이다. 한때 사랑했거나, 사랑을 하는 듯 마는 듯 아련한 경험을 한 남녀가 수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된다면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 볼 일이다.

‘호우시절’ 정우성과 고원원
‘호우시절’ 정우성과 고원원

● 한국 관객의 재평가 기다리는 주인공들

미국과 유럽을 잇는 남녀의 사랑으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이 있었다면 이제 한국과 중국 간 '호우시절'이 회자될 전망이다.

허진호 감독과 정우성, 그리고 고원원은 한국영화관객에게 한동안 외면당해온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허진호 감독은 초기작의 성공 이후 나름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배용준과 손예진이 출연한 야심작 '외출'의 흥행과 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최근작 '행복'도 허진호 마니아 외엔 외면당했다. 정우성 또한 '비트' '태양은 없다' 등 한국의 제임스 딘이 되는가했으나 이후 출연한 블록버스터 급 야심작들이 그저 그랬다. 세 남주인공 중 하나인 '좋은 놈' 정도로 자리매김 하면서 요즘은 '정원'이와 열애하는 생활에 빠져있지 않았던가?

한편 고원원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질 기회를 잡지 못했었다. '호우시절' 3인방 중 최근 우리관객의 주목은 단연 고원원에게 쏠리는 듯하다.

'호우시절'의 개봉과 함께 최근 한국매체와의 인터뷰 열풍에 휩싸인 고원원은 스스로 친한파이며 김치와 소주를 즐기는 한국 마니아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출연작의 한국개봉을 앞둔 해외 연예인의 립서비스로 폄하하더라도 고원원의 이제부터의 한국 관련 행보는 우리 누리꾼들의 주요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배우로서의 고원원은 현대물과 사극이 모두 잘 어울리는 시원한 마스크에 더하여 단아한 분위기를 지녔다.

'호우시절'은 두보의 시구처럼 시의 적절하게 메마른 감성을 채워줄 작품이고 특히 고원원은 신선하게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올가을에 홀연히 나타난 이국적이지만은 않은 여배우다. 장백지처럼 한국영화에 딱 한 작품만으로 남지 않기를.

최영일 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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