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대통령 기록물’ 주인은 국민이다

  • 입력 2008년 7월 14일 03시 01분


새 정부 출범 후 100일도 넘은 지금에야 전모가 국민 앞에 드러난 대통령기록물 유출 사건과 그에 관한 논란을 보면 이런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직자와 민간인에 관한 중요한 인사파일과 최고위급의 정책결정 과정을 노출시키는 전자결재 과정과 문서파일은 물론 국방과 안보, 대북정책에 관련된 극비의 문건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 대통령실 e지원 시스템이다.

이것이 청와대도 국가기록원도 아닌 다른 장소로 유출된 사건이 어찌 현재의 청와대와 전직 대통령 진영 사이의 공방, 또는 여야 간의 공방에 맡겨 둘 문제인가. 이 사건이 어찌 기록에 관한 ‘소유권’ 또는 ‘열람권’의 문제로 축소되고 단순히 ‘원본’의 반환 또는 파기로 매듭지을 문제인가.

사건의 윤곽은 분명히 드러난 듯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생산된 주요 문건은 거의 모두가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새 정부에 인계되는 대신 한편으로는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넘겨지고 다른 한편으론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사저로 옮겨졌다.

私人의 국가기밀 유출 사건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서 나온다. 대통령기록관에 넘긴 자료는 국회 재적 3분의 2의 동의나 법원의 영장 없이는 15∼30년간 열람할 수 없으므로 새 정부는 필요한 정보에 대한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반면 전직 대통령은 자신의 재량과 능력에 따라 국가 기밀에 속하는 자료를 관리 처분하는 법적 권리는 아니라도 실질적인 힘과 책임을 갖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리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라고 해도 이제는 사인인 특정 개인이 그러한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스스로 떠맡으려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노 전 대통령 측은 재임시절 기록에 대한 열람권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음을 유출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열람권이란 정보소유권과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다른 국민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특전으로서의 열람권 행사나 그와 관련해 제공해야 하는 편의와 예우는 사료에 대한 접근이 필요한, 적절한 사유가 발생할 때에 한해 열람 기록을 남기는 조건으로 허용돼야 함이 상식이다.

대통령 재임기간에 만든 자료라도 일기나 사생활에 국한된 자료가 아닌 이상 그 주인은 대통령에게 통치권을 위임한 국민이지 대통령 개인이 아님이 민주국가에서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작년 4월에 제정한 국가기록물관리법에 그런 조항이 명시돼 있지 않다면 국회는 지금이라도 서둘러 법을 보완 또는 개정해야 한다.

자료 유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이 인터넷으로 자료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경기 성남시에까지 가서 자료를 쓸 수 있겠는가라는 말 아닌 말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이전 시대에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은 각기 수십만 건의 서류를 집으로 옮겨 갔어야 했는가. e지원 시스템을 옮기는 과정에서 혹시 정보 유출 가능성이 없었는가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이번 사건이 이렇게 확대된 데 대해서는 새 정부도 일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인수위 시절에도 업무의 인수인계에 필요한 인사 기록에 대한 접근조차 불가능함을 알았다면 문제를 즉시 공론화해서 법적 조처를 취했어야지 물러나는 정부와 협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정권인수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며 그에 대해서는 물러나는 대통령과 새 대통령 모두 국민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정치인은 정권교체를 살고 죽는 문제로 볼지 몰라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국정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서 심각하게 다루기를

왕조 시대에나 민주주의 시대에나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국가 기록을 매우 엄정하게 관리한다.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그것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할뿐더러 기록은 도덕적 투명성, 곧 덕치를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 때문에 국가기록물관리법을 만들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본다면 그 법은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을 발휘할 소지를 매우 많이 담고 있음이 드러났으며 특히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대한 대비가 매우 허술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에만 맡길 일이 아니고 국회 차원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최재호 기자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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