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본 이스라엘

  • 입력 2008년 5월 17일 08시 09분


홀로코스트 박물관 내 ‘얼굴들의 탑’ 전시관. 900년의 역사를 지닌 유럽 동부 에이시쇼크라는 유대인 마을 주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3층 높이로 전시돼 있다. 1941년 들이닥친 나치군은 사진의 주인공인 주민들을 이틀 만에 몰살했다. 사진 제공 미국홀로코스트박물관
홀로코스트 박물관 내 ‘얼굴들의 탑’ 전시관. 900년의 역사를 지닌 유럽 동부 에이시쇼크라는 유대인 마을 주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3층 높이로 전시돼 있다. 1941년 들이닥친 나치군은 사진의 주인공인 주민들을 이틀 만에 몰살했다. 사진 제공 미국홀로코스트박물관
워싱턴 시내 스미소니언 박물관 거리 인근에 있는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전경
워싱턴 시내 스미소니언 박물관 거리 인근에 있는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전경
#장면1.

"이스라엘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기 있게 싸워 왔습니다. 앞으로 60년 후, 이스라엘 건국 120주년 때를 상상해 봅니다."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을 기념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5일 의회 특별연설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알카에다, 헤즈볼라 같은 '테러집단'이 사라진 중동의 미래를 제시했다.

#장면2.

비슷한 시간,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인 요르단 강 서안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현지 인터넷 언론들에 따르면 사이렌 소리와 동시에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1948년 팔레스타인인 76만 명이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난 '나크바'(재난이란 뜻) 60주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건국 후 지나온 '인고(忍苦)의 날짜'를 뜻하는 2만1915개의 검은 풍선이 하늘로 올랐다.

"소련이 사라졌듯 이스라엘도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타이르 군·15세·하레츠닷컴과의 인터뷰)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을 맞아 들려오는 상반된 전망을 들으며 15일 미국 워싱턴 시내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찾았다. 평일인데도 입구에는 입장객들이 50m가 넘게 늘어서 있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뭐 새로 알게 있을까? 학교에서, 영화와 문학작품에서 숱하게 접해왔는데…'란 생각은 지하1층, 지상 5층 규모의 박물관에 들어선 직후부터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주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것은 1945년 독일 중부 오르드루프 집단수용소에 진주한 미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쌓인 유대인 시신 앞에서 망연해하는 모습을 담은 대형 사진이었다.

이어 수백만 명이 가스실에서 집단 학살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히,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전시물과 영상물을 거쳐 가면서 관람객들은 말을 잃어 갔다. 하지만 가슴에 이는 것은 격정 같은 슬픔보다는 회한 같은 의문이었다. 왜 인류는 이런 광기를 막지 못했을까.

작은 방에선 '히틀러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는가'를 주제로 한 15분짜리 영상물이 반복해서 상영되고 있다. 국민의 불만을 교묘히 파고드는 대중선동과 공포정치, 집단최면에 걸린 듯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버리고 선동에 휩쓸려 가는 독일 국민의 역사가 펼쳐졌다.

박물관이 고발하는 것은 나치의 범죄만은 아니었다.

앤드루 홀린저 박물관 대외협력팀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2차 대전이후에도 인류는 여러건의 학살을 경험해왔는데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학살이 자행됐는지, 왜 인류가 그것을 막지 못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스니아 학살, 수단 다르푸르 사태 등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고 있다. 전시물은 포퓰리즘과 선동, 증오의 부추김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효과적인 정치 전술로서 사회를 위험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날 실내를 가득 메운 관람객의 3분의 2가량은 중고교생이었다. 대부분 워싱턴 메릴랜드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주 등 워싱턴 인근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1993년 개관 이래 2400만 명이 박물관을 찾았고 그중 800만 명이 학생이었다. 관람객의 90%는 비(非)유대인이라고 홀린저 팀장은 설명했다. 박물관 웹사이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상세한 설명자료를 담고 있는데 한해 사이트 방문객이 15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방명록을 펼쳐 보니 학생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전시는 1층의 '어린이를 기억하며: 다니엘의 이야기' 전시 코너였다. 다니엘이란 소년의 일기를 주제로 독일의 한 유대인 가정에 10년여간 닥친 고난이 펼쳐진다.

마지막에 "150만 명의 어린이가 못다 핀 채 죽어갔습니다. 8년 동안 매일 학교 1개씩을 통째로 없애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어머니와 여동생 에리카도 그날 (수용소 도착)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란 음성녹음이 나오자 관람객들은 눈시울을 훔쳤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인부로 일하다 탈출한 루돌프 브르바 씨의 글도 눈에 들어왔다.

"하루에도 5대 이상씩 낮이고 밤이고 유대인들을 가득 태운 램프(유대인 수송 열차가 멈추는 플랫폼)에 들어왔다. 앞차로 온 사람들이 이미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를 모른채 사람들은 계속 내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들중 90%가 몇시간내에 가스실에서 죽을 것임을…."

기차에서 내린뒤 샤워를 하러 가는건 줄 알고 옷을 벗기 앞서 불안해 하는 여성들, 불안하면서도 긴 기차여행이 끝난 안도감에 수다를 떠는 사람들, 우는 아이, 장난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담은 사진 앞에서, 잠시후 그들이 맞이한 운명을 알고 있는 관람객들은 발길을 떼지 못한다.

대체로 객관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역사를 기록한 전시물들은 자연스럽게 반(反) 유대이니즘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내는 듯 보였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왔다는 제이미 카렌스(10학년·한국의 고교1학년) 양은 "당시 유럽이 반 유대인 정서에 휩쓸리는 과정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2차 대전이 끝난지 63년이 지났지만 미국 곳곳에는 이와 비슷한 박물관, 기념관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홀린저 대외협력팀장은 "휴스턴 시카고 마이애미 뉴욕 로스앤젤레스 디트로이트 등 주요 대도시마다 박물관이 있다"고 말했다. 조만간 시카고 근교에도 대형 기념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설립 주체나 운영 방식, 재원은 다양하다. 워싱턴 박물관은 미 연방정부가 땅을 제공하고 건축비는 성금을 모아 지었다. 1979년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위원회를 만들어 유대계 의원들의 주도로 80년대에 법을 만드는 등 개관까지 14년의 준비 기간을 거쳤다. 6600만 달러의 연간 운영비 중 60%는 연방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기금과 성금으로 충당한다. 다른 지역 박물관 중에는 주 정부가 지원하는 곳도 있고 순수 민간 차원도 많다.

이런 노력을 주도하는 핵심은 유대계 커뮤니티다. 자신들이 겪은 학살의 역사를 보존하고 세상에 끊임없이 드러내려는 그들의 노력은 21세기 적대적 환경 속에서 생존하려는 지혜의 산물이 아닐까.

박물관을 나서려니 현관 벽면에 새겨져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기념관은 어딘가 도사리고 있을 광기에 맞서 안전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투자다."(1993년 4월 23일, 대통령 빌 클린턴)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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