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초짜 장관

  • 입력 2008년 3월 26일 20시 46분


19일 미술계 관계자 10여 명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긴급 호출을 받았다. 장소는 청사 구내식당. 유 장관이 ‘친노(親盧) 코드 기관장’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사퇴를 촉구한 뒤여서, 참석자들은 전쟁을 선포한 장관의 비장한 발언을 예상했다. 그러나 난데없는 장관의 언론 탓에 당혹했다. 유 장관은 “본의 아니게 뉴스의 중심이 됐다. 친한 기자한테 말한 것이 그대로 기사가 됐다”고 했다. 한 참석자는 “왜 불러 모았는지 어리둥절했다. 여론만 주시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튿날 유 장관은 산하기관인 국립민속박물관 업무보고에서 “당사자분들께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닷새 뒤인 25일 유 장관은 두 번째 사과를 했다. 대표적 친노 코드 인사가 총장으로 있는산하기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업무보고 자리에서였다. “(장관) 초짜로서 과정을 치러가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장관의 사과가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 한예종 교수는 “총선을 앞두고 나빠지는 여론을 의식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일축했다.

신이 난 사람들은 좌파 문화계 인사들이다. 유 장관에게 대놓고 “권력의 나팔수” “완장을 찬 홍위병” “정권의 돌격대장”이라는 막말까지 퍼붓고 있다. 한 문화계 인사는 “잔뜩 긴장해 있던 사람들이 유 장관의 사과 이후 몰라보게 당당해졌다”고 귀띔했다. 그의 오락가락 행보를 보면 서양 속담대로 ‘씹어 삼키기에 너무 많은 것을 베어 물었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말대로 ‘초짜’같다. 우선 그는 상대를 너무 몰랐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지 헤아릴 만큼 사려 깊지도 못했고, 예상되는 공세를 견딜 만한 이론적 토대도 없었다.

‘예술과 시민사회’의 오상길 대표는 “막무가내로 그냥 ‘나가라’고 하면 누가 나가겠느냐, 상대방을 뭉치게 하는 빌미만 준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지난 10년 좌파 문화세력이 저지른 부패와 무능을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고 확고한 정책 방향을 제시해 국민적 공감대를 먼저 얻는 게 순서였다”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의 문화정책은 ‘문화와 예술은 이념을 전파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돼 왔다. 그들에게 ‘자리’라고 하는 것은 ‘밥벌이’의 의미와 함께 자리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이 담긴 이념적 하드웨어다. 버티기로 일관하는 ‘코드 기관장’들 행태의 뿌리는 개개인의 품성 탓이라기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무시해도 좋다는 잘못된 신념이 바탕이 된 직업관에 있다. 그러기에 ‘나가라’고 하는 쪽에서는 보다 정교한 절차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정당성이 필수다.

유 장관은 한예종 업무보고에서 자신이 불러일으킨 ‘코드 갈등’을 드라마의 갈등→오해→대립→매듭에 비유했다. 아직도 무대마다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십분 양보해 유전자에 각인된 배우 마인드를 못 버린다면, 진정한 연기는 배역에 몰두해 인물을 재창조하는 것이지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대사를 읊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유 장관이 발 딛고 선 곳은 가상 무대가 아니라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리얼’이다. ‘초짜’라는 말이 연기를 처음 배우는 아마추어라면 몰라도 행정 전문가여야 할 장관 입에서 나오니 딱하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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