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기호]번역은 거인국, 인문학은 소인국

  • 입력 2008년 3월 18일 02시 58분


일본에서 새롭게 뜨는 문학이 휴대전화소설과 라이트노블이다. 휴대전화소설은 말 그대로 휴대전화로 소설을 쓰고 읽는 것이다. 무명 신인이 펴낸 책도 3만∼5만 부는 기본이고 휴대전화소설이 소설 베스트셀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열풍이다.

해설서만 읽고 쓴 평론 부지기수

표지와 삽화에 애니메이션이 다수 등장하는, 젊은 층 대상의 가벼운 오락소설을 뜻하는 라이트노블에는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세대가 깊이 빠져 있다고 한다. 2005년에 이미 신간 발행종수가 2000종을 넘어섰으며, 독자층도 40대까지 확대되고 책을 찾는 기호도 다양화, 세분화되고 있다고 한다.

소설 대부분이 초판 3000부도 소화하기 어렵고 팔리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인 현실에서 일본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종이, 펜보다 스크린과 마우스가 친근한 우리 영상세대가 어떤 소설을 즐겨 읽을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1971년생 소장평론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대표적이다. 그는 작년 4월에 펴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라이트노블과 미소녀 게임 분석을 통해 현대사회의 이야기성 해체와 새로운 리얼리즘에 대한 가능성을 천착했다.

그는 인간 이해에 대한 풍부한 철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서 작품을 세세히 분석하면서 결론을 도출하는데, 양질의 라이트노블 중에 근대가 낳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대체할 리얼리즘이 태어난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게임적 리얼리즘’이다. 이는 게임을 리셋(reset)함으로써 몇 번이라도 다시 살 수 있는 게임 캐릭터 같은 리얼리즘을 뜻한다.

나는 아즈마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왜 이런 평론가를 찾아보기 어려운가 생각했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뿐 아니라 그 바탕 위에서 주류 문화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내놓는 사람은 더더구나 찾아보기 어렵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학문의 조류나 대형 학자가 등장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들뢰즈나 가타리, 라캉, 데리다 등의 그늘에서 우리는 반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의 말을 한 구절이라도 언급하지 않고선 논의의 장에 낄 자격조차 없는 듯한 분위기마저 조성됐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씨는 최근 펴낸 비평서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 지성사)에서 “스무 편 되는, 임자가 다른 평론의 대부분이 프랑스의 한 정신분석학자를 원용하고 있어 놀랐다”고 썼다. 정 씨는 그 사람의 글이 번역되지 않은 채 해설서가 난무하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그는 말했다’고 쓴 글들은 한결같이 ‘그가 말했다고 한다’로 바뀌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한국의 지적 인프라는 심각할 정도로 부실하다. 뉴욕타임스 주말판 북리뷰 보도(2007년 4월 15일자)에 따르면 한국은 체코와 함께 번역서 비율이 세계 최고인 29%나 된다. 중국 4%, 미국 2.6%, 일본 8%에 비하면 가히 번역왕국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런 번역서는 만화, 아동서적, 대중소설, 자기계발서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 철학서 등 마땅히 간행돼야 할 책은 갈수록 소외되는 형편이다.

꼭 필요한 책부터 번역 출간해야

원전은 볼 수 없는데도 그 해설서만 줄지어 번역 출간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원전의 발췌본을 대량으로 펴내 인문학 부흥에 기여하겠다는 출판업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고서 원전과 마주해야 하는 인문학이 부흥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출판계, 나아가 문화계나 정책당국자들이 제대로 된 안목을 갖고 꼭 필요한 책부터 번역 출간해 지적 인프라를 확실하게 구축하겠다는 각성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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