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카스트로와 게바라

  • 입력 2008년 2월 26일 03시 01분


둘의 만남이 없었다면 쿠바의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쿠바에서 온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가 1955년 여름 처음 만난 곳은 좌익 지식인들의 망명처 멕시코였다.

남미의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스물일곱의 게바라는 우연히 만난 두 살 연상의 카스트로가 밤새워 토해내는 열변에 압도돼 그 자리에서 평생의 진로를 ‘쿠바혁명’으로 정해버렸다. 카스트로도 그를 본명 대신 ‘체(Che·친구를 부르는 스페인어) 게바라’라고 부르며 쿠바 해방을 위한 대열에 합류한 것을 환영했다.

이듬해인 1956년 11월 26일 새벽 두 사람을 비롯한 82명의 혁명 동지는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 만을 떠났다.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12월 2일 쿠바 섬에 도착한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의욕만 넘치는 지도자, 그리고 문맹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쿠바 혁명군 사이에서 게바라는 ‘두뇌’ 역할을 했다. 그는 게릴라전의 전략을 세우고 오합지졸을 강력한 사상 투쟁 정신으로 무장한 1등 전사로 키워냈다.

혁명군이 바티스타 정규군을 이겨내고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해 정권을 잡을 무렵 이방인 게바라는 카스트로의 ‘오른팔’로 불리는 2인자가 돼 있었다. 그는 독재자 카스트로에게 절대 복종하며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혁명 정부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혁명의 영웅들 사이에도 간극이 생겨났다. 반체제 인사에서 체제의 우두머리가 된 카스트로에게 게바라의 때 묻지 않은 이상주의는 버거웠다.

사유재산을 몰수한 카스트로는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냉장고나 휴가 등의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반면 게바라는 도덕적 인센티브를 주장했다. 뛰어난 노동자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만으로도 충분하므로 물질적 보상은 필요 없다는 이상론이었다.

1964년 산업부 장관이던 게바라의 유엔 연설로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게바라는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을 “이타주의가 결여돼 있다”고 공격해 미국의 봉쇄정책(엠바고)으로 소련의 지원이 절실한 카스트로를 난감한 처지에 몰아넣었다.

이후 게바라는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게바라는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을 돌며 혁명과 저항 정신을 전파해 국제적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 잡혀 사살됐다.

더는 ‘쿠바식 혁명’이 불가능함을 드러냈음에도 그는 요절한 탓에 전 세계 좌파 진영의 영웅이 됐다. 반면 살아남은 카스트로는 공산 정권들의 잇단 붕괴로 고립무원 속에 평생의 과업인 혁명의 실패를 지켜보는 처지가 됐다.

무모한 사회주의 체제에 미국의 봉쇄정책까지 겹쳐 쿠바의 경제는 거덜 났다. 지하경제에조차 뇌물과 관료 부패가 만연해 있다. 쿠바인들은 이를 ‘내적 봉쇄’라고 자조한다.

카스트로는 혁명 정부 수립 직후 “좋은 정부를 만든다는 약속이 실현되면 턱수염을 깎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49년의 철권통치 끝에 24일 동생 라울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넘겨줄 때까지 그는 수염을 깎지 않았다.

게바라와 함께 턱수염을 기르고 시가를 피우며 호기롭게 혁명을 꿈꾸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아니면 도저히 혁명의 성공을 인정할 수 없는 일말의 양심 때문일까.

이진영 국제부 차장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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