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송평인]68혁명과 한국의 386

  • 입력 2008년 1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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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현대사가 근대사보다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다.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도 그렇다.

파리에서 남쪽 방향 교외선(RER)을 타고 라 크루아 드 베르니 역에 내리면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앙토니 기숙사(공식 명칭은 장 제 기숙사) 단지가 휑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1968년 5월 혁명은 이보다 3년 앞선 1965년 이곳의 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의 출입을 허용해 달라’며 시위를 일으킨 것이 발단이 됐다.

3년 뒤 낭테르대에서도 비슷한 요구가 시위로 번져 갔다. 프랑스 대학은 비좁기 때문에 기숙사는 대학과 떨어져 별도로 운영되며 여러 대학 학생들이 함께 거주한다. 그러나 파리 교외에 최초로 미국식 캠퍼스로 지어진 낭테르대에는 대학과 기숙사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는 기숙사의 문제가 곧바로 대학의 문제가 되는 구조였다.

기숙사 문제로 촉발된 대학 당국과 학생 간의 불화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총장실에서 만난 올리비에 오데우 총장은 “68년 5월은 본래 성(性)에 대한 작은 ‘문화혁명’으로 출발했지만 대학과 전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대되어 갔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베트남 반전 시위 주동자가 경찰에 연행되자 이에 반발하며 대학본부를 점거했다. 초유의 대학본부 점거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자본가의 하수인을 키워 내는 ‘부르주아 대학’을 전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5월 들어 낭테르대가 폐쇄되면서 학생들은 소르본대로 몰려갔다. 파리 교외의 작은 혼란은 일순간 전국적 사건이 됐다.

학문적 ‘성소(聖所)’로 여겨지던 소르본대에 경찰이 들어가 학생을 마구 연행하자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드골 정권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뜻에서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부르주아 정권은 필연적으로 권위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체제 타파를 외쳤다.

그들은 이어 소르본대를 점거했다. 학생들은 권력의 장악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다가온 시험에 대해 그들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똑같이 시험을 보는 것은 평등하지 못하다”며 “혁명만이 시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술학교 학생들은 오데옹 극장을 점거했다. 그들은 스펙터클과 스타 시스템의 자본주의 예술을 거부하고 익명의 집단 예술을 추구했다.

오데옹 극장장인 장루이 바로는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는 극장을 점거한 학생들 사이에 서서 ‘자아비판’을 통해 감독의 지위를 내던지고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배우임을 선언했다.

68년의 주장과 행동에서 기자는 1980년대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 사이에 오가던 논의의 주제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68년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운동의 주동자들은 노조와 정계로, 언론으로, 학교로 각각 흩어져 들어가 프랑스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386세대도 이들처럼 오늘날 노조와 학교와 정계에 자리를 잡았다.

영미권에서 1960년대 정신은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의 등장에 따라 쇠약해졌다. 마거릿 대처 총리는 “사회? 그런 것 없다. 개인이 있을 따름이다”라고까지 말하며 1960년대 정신과 싸웠다.

프랑스에서는 지금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 정신과 싸우고 있다. 68세대가 남긴 노동관 교육관 정치관을 고치지 않고는 쇠락한 프랑스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흔적이 이미 깊이 각인된 한국은 어떤가.

송평인 파리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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