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태동]세모(歲暮)의 길목에서

  • 입력 2007년 12월 2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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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격동의 2007년도 저물어 간다. 누군가는 황혼 빛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아픔과 슬픔이 짙게 묻어 있다. “미(美)는 우수(憂愁)와 함께한다”는 존 키츠의 말처럼, 우리는 한 해가 가는 12월의 아름다움 속에서 내면으로 젖어드는 숭고한 아픔과 회한으로 얼룩진 아쉬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12월의 저문 날 고향으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군상(群像)에는 물론 담배 연기 자욱한 선술집에도 휴식을 위한 정지된 시간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상실과 후회, 낭만과 우수가 깃든 술잔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계절의 시간에서 볼 수 있는 권태로운 감상의 눈물로 얼룩진 술잔이 아니라 내일을 다짐하는 아픔의 잔이다. 만일 12월이 재생을 약속하는 ‘작은 영원’이 아닌, 단지 죽음을 의미하는 ‘종말의 시간’이라면, 세모의 풍경은 그렇게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12월의 풍경은 새로움을 약속하는 미완성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미로움 속의 아픔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12월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1월로 이어지지 않는가. 12월의 거리에 울려 퍼지는 성탄의 노랫소리와 차가운 겨울 하늘의 별들이, 제야의 종소리처럼 아름답고 슬픈 여운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그것들이 종말을 의미하는 만가(輓歌)나 완성의 표상이 아니라, 내일을 약속하는 미완성의 교향악과도 같은 것이다.

유형(流刑)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절대적인 완성의 단계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항상 기쁨 속에서도 슬픔을 느끼고, 또 슬픔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역설적인 이원론적 존재이다. 인간의 삶의 풍경은 이러한 운명 때문에 더더욱 아름답고 값지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빈 터’이자 ‘작은 영원’인 12월의 세계가 종말에 대한 감상적인 슬픔으로 누추하게 보이지 않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결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어둠과 싸우는 비극적인 숭고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의 드라마가 지니는 아름다움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정지된 영겁의 세계인 천국(天國)에는 없다. 그것은 다만 지상(地上)에 있는 순간적인 ‘작은 영원’과 그것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과 그것을 축하하는 카니발에 있다. 12월의 풍경, 그것이 어둠 속에서도 그렇게 경건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영원한 종말을 거부하는 인간의식이 ‘작은 영원’인 12월의 빈 터에서 그 조용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세모의 어둠은 이렇게 밝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어둠이 없으면 빛이 있을 수 없고,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어둠과 빛의 함수 관계와 변증법은 역사의 경우뿐만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개체적인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12월의 아픔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새벽의 빛이 찾아올 것이다. 시인 김종삼이 ‘북 치는 소년’이란 시편에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희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이라고 노래한 것은 이러한 신비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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