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장춘]다그치다 퇴박맞은 대통령

  • 입력 2007년 9월 1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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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조급한 것 같다. 그가 7일 호주 시드니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보인 모습으로 볼 때 그렇다. ‘반미면 어때?’를 외치며 권좌에 오른 한국 대통령이 결국 임기 말에 외교준칙을 무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그렇게 통사정하며 퇴박맞을 수 없었다.

외교준칙 무시하고 부시 압박

그날의 그 만남 끝에 언론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다.

노: (부시가) 6·25전쟁 종전선언에 대해 언급을 안 했는데 우리 국민이 듣고 싶어 하니까 명확히 말씀해 주기 바란다.

부시: 우리가 평화체제 제안을 할 수 있을지는 김정일에게 달려 있다. 그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

노: 똑같은 얘기인데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은 그 다음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해 주기 바란다.

부시: 더 분명히 말할 수 없다(I can't make it any more clear). 6·25전쟁이 끝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김정일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 활동과 핵무기를 없앨 때 끝날 것이다.

공개적으로 노 대통령이 듣고 싶은 말과 부시 대통령이 하기 싫은 말은 소위 ‘평화협정’이었다. 외교관이 ‘그렇다(yes)’고 말하면 ‘아마도(maybe) 그렇다’는 뜻으로, ‘아마도 그렇다’고 비치면 ‘그렇지 않다(no)’를 시사한 것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외교에서는 ‘아니다’의 부정 어법을 잘 쓰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언급을 안 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외교어법에 생소한 노 대통령의 다그침에 부시 대통령은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사람은 어궁한 연출로 꼭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되풀이해야 했다. 외교는 상호 이견이 있더라도 가급적 덮어 두며(papering over) 하다못해 ‘불합의하기로 합의하기(agree to disagree)’까지 한다. 그렇지 못한 이번의 노-부시 대면은 외교가 아니었다.

시드니에서 노 대통령이 노출한 파행의 까닭은 뻔하다. 10월 초 평양에서 김정일과 함께 공연할 내용의 핵심 소재로, 또 12월 대선을 노린 득표계획의 일환으로 소위 ‘평화협정’을 써먹으려 집착했기 때문이다. 남이 북에 ‘퍼 주고’ 북이 남으로부터 ‘뜯어먹는 것’은 사실상 제도화돼 이번에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돌파구’라는 다른 핑계가 절실하다. 임기 말에 말도 안 되는 ‘퍼주기’만의 속편 드라마로는 이미 크게 속은 남한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효과를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다른 속셈에 ‘평화협정’ 집착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부시 대통령이 힘주어 말한 대로 북한의 검증 가능한 핵무기 포기가 평화협정의 절대조건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사실상 핵무기국가로 등장한 북한이 핵을 포기할 리는 없다. 핵무기와 평화협정을 바꾸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김정일은 당당한 핵보유 국가로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몰아내려는 숙원을 달성할 참이다.

평화협정이 팔릴 수 있는 곳은 남한뿐이다. 소위 6자회담이라는 면피용 외교가 중국이 제공하는 무대 위에서 ‘평화의 찬가’를 연주하며 북 핵의 포기 시나리오를 읊어 대는 것에 홀릴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54년 전에 끝난 전쟁 이후에 미국과 함께 유지해 온 길고 긴 ‘진짜 평화’로 이뤄 낸 경제기적을 망각하고 말이다. 한국 외교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부러워할 그런 평화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역사적 시대착오(historical anachronism)’에 빠진 것 같다.

이장춘 외교평론가 前주오스트리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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