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미친 삶이라고? 역사는 그들만 기억한다…‘조선의 프로페셔널’

  • 입력 2007년 3월 31일 03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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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파격적인 기행 때문에 불우한 삶을 살았던 화가 최북.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조선 후기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파격적인 기행 때문에 불우한 삶을 살았던 화가 최북.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 지음/436쪽·1만9000원·휴머니스트

“사람들이 비웃는다. 속된 뿌리가 골수에까지 파고든 사람은 비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 년 뒤에 비웃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비웃음 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여기 조선의 프로페셔널 10명이 있다.

‘조선’과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조금은 생소하지만 저자는 프로페셔널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는 도전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여행가, 프로 바둑기사, 책 장수, 만능 조각가, 천민 시인 등을 소개했다. 저자가 본 조선 시대 프로페셔널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그들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경상도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 출신인 정란은 전문 여행가였다. 그는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의 모든 명산을 등반하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사대부들에게 ‘현실 도피’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그는 “허황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문 바둑기사인 정운창도 좋은 사례. 당대 국수(國手) 김종귀와의 결전을 기다리며 그는 바둑을 두는 이유에 대해 “한 가지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자는 것일뿐”이라고 ‘쿨’하게 답한다.

둘째, 그들은 자기 전공에 미쳐 있었다.

바둑기사 정운창은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바둑만 공부했고, 천민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단전은 10년 동안 독학으로 주경야독했다. 신출귀몰한 판매 방법 때문에 ‘조신선’이라 불린 조선 최고의 책 마케터 조생도 마찬가지. “저잣거리로 달려갔고 골목으로 달려갔고 서당으로 달려갔고 관아로 달려갔다.” 당대 그에 대해 묘사한 글을 보면 그가 홍보와 판매에 얼마나 열성을 다했는지가 느껴진다.

셋째, 그들은 자존심 하나로 버텼다.

정열의 화가 최북은 그림을 강요하는 고관의 청을 거절하며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애꾸를 만들었고, 18세기 각종 사대부들이 남긴 기록에 등장하는 검무(劍舞)의 대가 운심은 아름다운 영변 약산만이 자신이 묻힐 만한 곳이라며 자살을 시도했다. 나는 학을 내려앉게 만들었다는 거문고의 거장 김성기는 주위의 융숭한 대접을 고사하고 초라한 나룻배에 몸을 싣고 자신이 연주하고 싶을 때만 악기를 탔다.

그런 이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비켜가기 어려웠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열정이 인정받기에는 당시의 사회 관념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 중국을 여행할 수 있다면 노비가 돼도 상관없다”고 외친 여행가 정란은 당시 사대부들에게 ‘사회 낙오자’의 낙인이 찍혔고, 깐깐한 성격 탓에 빈곤한 말년을 보낸 최북은 길가에서 얼어 죽었으며, 신분상의 제약으로 능력을 펼치지 못한 천민 시인 이단전은 폭음으로 객사했다.

그러나 이들의 ‘미친’ 삶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학자 이용휴가 여행가 정란을 평한 글의 일부다. “사람들이 비웃는다. 속된 뿌리가 골수에까지 파고든 사람은 비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 년 뒤에 비웃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비웃음 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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