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쌀과 비료

  • 입력 2007년 2월 19일 19시 19분


코멘트
1945년 남북 분단 직후 남한이 식량난을 겪은 것은 함경남도의 흥남비료공장에서 내려오던 화학비료의 공급이 끊긴 탓이 컸다. 흥남비료공장은 연간 생산량이 48만 t이나 되는 세계적인 비료공장이었다. 남한 지역은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비료의 3분의 2를 공급받았으나 하루아침에 공급이 중단됐던 것이다. 1961년 충주비료공장이 준공되기 전까지 남한의 농업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흥남비료공장은 요즘 설비가 노후화되면서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자체 생산할 수 있는 화학비료는 5만여 t에 불과해 적정 수요인 60만 t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세계 인구는 10억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60억 명의 인구가 거뜬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화학비료 덕분에 식량 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비료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북한의 식량난 해결은 어렵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라디오 대담프로그램에 출연해 “북한 사람들은 남한이 쌀과 비료를 주지 않으면 남북관계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27일 평양에서 개최되는 남북장관급 회담을 앞두고 나온 말이다. 북한이 말하는 소위 ‘민족공조’의 실체가 뭔지, 이 한마디로 드러난다. 남한으로부터 돈과 물자를 얻어 내려는 것이라는 ‘체험적 고백’과 다름없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과 현 정부의 초대 통일부 장관을 지내며 북한과 접촉해 온 책임자였다.

▷쌀과 비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저 조건이다. 이것조차 해결 못하는 김정일 정권은 그렇다 치자. 남한 정권은 어떤가. 정 씨가 말하는 ‘북한 사람들’이란 북한 정권 관계자일 터이다. 현 정권은 결국 김정일 정권과 공조해 왔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다. 진보의 가치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하고 억압과 맞서는 데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유연한 진보’라고 불렀지만 북한 주민의 비인간적 삶을 외면한 ‘민족공조’는 진보와 공조 그 어느 것도 아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