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소르망 씨, 제가 틀렸습니까

  • 입력 2007년 2월 8일 20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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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반미 국가라거나 한국 여론이 반미적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습니까?”

2004년 9월, 프랑스 문화비평가 기 소르망의 방한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기자가 질문을 던지자 얼핏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서툰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을까 싶어 서둘러 메모를 건넸다. ‘반미 시위는 다양한 의견 표명 과정의 일면일 뿐이다. 한국 정부도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자의 만용이었을까. 그러나 소르망은 당시 한국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에서 세계의 ‘반미 전선’을 논하며 “한국의 여론은 미국에 적대적이며 미국이 민족문화와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1980년대에 신문 외신면을 읽으며 반미 국가라면 베트남이나 리비아, 니카라과 정도가 뇌리에 각인됐던 기자에게 한국이 ‘반미’ 국가의 명단에 든다는 지적은 사실과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소르망도 “접근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이라며 한발 뺐다.

그러나 그 뒤 상황은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취임 전부터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했던 대통령은 “미국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형님만 믿겠다(고 하는), 이게 자주국가 국민의 안보 의식일 수 있느냐”고 일갈했다. 최근 미국 한반도 전문가 24명을 심층 면담한 뒤 작성된 정부의 보고서는 이들이 한미관계를 ‘이혼’ 단계로 여기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마침 기자의 머릿속에 반미 국가의 원(原)의식으로 남아 있는 리비아와 니카라과, 베트남의 새 소식이 하나 둘 들려 왔다. 북한에 ‘핵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최고지도자는 공무원 3분의 1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민간 부문을 활성화한다’는 이유다.

1980년대 미국의 앞마당에서 미국과 ‘각’을 세웠던 다니엘 오르테가 전 니카라과 대통령도 요즘 권좌에 복귀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당선 직후부터 “니카라과는 안전하다. 미국 기업들의 투자를 환영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고위 공무원의 봉급을 대폭 삭감하는 조치도 내놓았다.

베트남은 2000년 이후 연평균 7.5%의 고속 성장 가도를 달린다.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군사부문에까지 이르는 전방위 협력을 약속했다. 16억 달러가 넘는 투자협력 계약도 곁들였다.

이들이 단지 미국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서 환심을 사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과도한 공공 부문을 축소하고 외자 유치에 전력을 쏟겠다는 공통의 관심사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국에 아직 이들보다 훨씬 긴밀한 우방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연인지 반미 국가의 혐의를 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부분에서도 이들 나라의 노력과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작은 정부’를 만들겠다는 다짐 속에도 공적 부문은 날로 비대해진다. 각종 규제를 벗어나 해외로 탈출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최근 주목을 받은 중국의 하이닉스반도체 공장 유치 제안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소르망은 지난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가 새로 내놓은 말 중에 “규제 중심, 사회보장 우선, 큰 정부 중심의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은 갔다”라는 대목이 신경 쓰인다. ‘이래저래 우리는 남들이 이미 폐기했거나 폐기하고 있는 낡은 모델에 매여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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