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시간의 선물

  • 입력 2007년 1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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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빠짐없이 8만6400원을 입금해 주는 신기한 은행이 있다. 근데 그날만 지나면 쓰든 안 쓰든 잔액이 다 빠져나간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은행은 새롭게 8만6400원을 넣어 주지만 밤이 되면 남은 돈은 계좌에서 깡그리 지워져 버린다. 어제로 되돌릴 수도 없고, 내일로 이월할 수도 없다. 오로지 오늘, 현재의 잔액으로만 살아야 한다.

수수께끼 같은 이 잔액의 비밀은 바로 하루 24시간, 즉 8만6400초의 시간이다. 신이 지상의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나눠 주는 이 선물 앞에서 누구도 가진 게 없다고 불평할 수 없다. 매일 자기 앞으로 입금되는 8만6400초에 감사하며 멋진 하루를 창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설사 어느 날엔 잔액을 서툴게 써 버렸다 해도, 오늘 다시 선물로 주어진 ‘현재’란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 근사한 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니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 너무 인색하게 굴어선 안 된다. 예컨대 하루 5분씩 푸른 하늘 올려다보기, 1주일에 한 번쯤 특별한 재능도 탁월한 사회성도 없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자신에게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인정해 주기, 마음만 먹은 채 ‘내겐 사치’라며 미뤄 두기만 했던 그 일에 도전해 보기 등도 좋겠다.

물론 받은 것이 있으면 베풀어야 할 것도 많다. 불가에서 보시(布施)란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여러 덕목 중 으뜸으로 치는 덕목인데, 물질적인 것을 주는 재(財)보시, 경전이나 책 또는 훌륭한 말씀을 베푸는 것을 법(法)보시, 상대에게 두려움과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고 한다. 앞의 두 가지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에게 벅찬 과제지만, 무외시는 누구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야 다르겠지만,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사람에게 맘속으로라도 ‘당신을 용서한다’고 중얼거려 보기, 늙으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노골적으로(?) 고백하기, 하루만이라도 가족끼리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잔소리 안 하는 엄마, 늦잠 대신 아이들과 뒹구는 아빠)도 생각해 볼 만하다. 혹은 오늘 누군가를 웃게 만들었는지, 인생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이에게 ‘괜찮아, 잘될 거야’라고 용기를 북돋는 말 한마디를 해 주었는지도 나만의 무외시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1월도 어느새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새해라고 특별한 뭘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개헌이니 파업이니 해서 2007년 벽두부터 우리 사회를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몰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는 바깥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내 삶의 기본에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적지 않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되레 ‘약자’임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날 무시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하는 식으로 ‘근육 자랑’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다른 이들에게 정신적 공포나 불안을 주지 않는 ‘무외시’를 실천해야 할 이는 바로 그들인데….

그렇다고 스트레스 팍팍 받거나 ‘언제 우리가 나라 덕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자기연민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아깝다. 올해도 여느 때처럼 예측불허의 상황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면, 새삼스레 놀랄 일도 한숨 쉴 일도 없으리라.

현재까지 받은 게 꽤 많고, 앞으로 베풀 수 있는 것도 그 못지않게 많다고 생각하며 대범하게 살자. 그러다 보면 일상 속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빛나는 기적들과 마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미석 문화부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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