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제 저런 교육]매출 2만원, 교훈 억만금

  • 입력 2007년 1월 3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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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지난해 가을 무렵 어느 토요일이었다.

오후가 되자 경기 부천시 중앙공원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책가방을 메고 집에 가는 아이들, 모처럼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러 나온 연인과 노부부도 보였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은별이는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물건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작아서 못 입는 옷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갖고 놀던 바비 인형, 책상서랍 한쪽에 ‘모셔두고’ 좀처럼 쓰지 않던 학용품들…. 하나같이 소중한 것들이지만 이제 은별이에게 더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자, 골라요, 골라.”

은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제법 장사꾼 흉내까지 내며 너스레를 떤다.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부천의 벼룩시장 아가씨

고은별(13) 양은 어느새 동네 ‘벼룩시장 아가씨’가 됐다. 부천 YMCA는 요즘 같은 겨울만 아니면 매주 토요일 동네 주민들을 위한 장터를 마련한다.

은별이는 뭐든 아껴서 오래 쓰는 버릇이 있어서 처음에는 정든 자기 물건을 남에게 판다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돈 버는 것, 장사하는 것도 다 경험”이라며 설득했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은별이는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장이 서는 토요일만 되면 모아 놓은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장터’로 향한다. 그의 하루 매출은 보통 2만∼3만 원.

“언니, 이것 좀 깎아 주면 안 돼요?”

은별이보다 족히 서너 살은 어려보이는 여자 아이들이 애교를 부리며 흥정을 한다.

“그래, 귀여운 손님들인데 좀 깎아 주지 그러니?”

어머니까지 옆에서 거들자 마음이 여린 은별이도 어쩔 수 없다.

벼룩시장이 끝나갈 무렵인 오후 5시경. 어느새 은별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엄마, 아빠가 너무 대단해 보여요.”

“갑자기 왜?”

“겨우 몇 천 원 벌기가 이렇게 힘든데 아빠는 오죽하시겠어요?”

어머니의 표정에는 미소가 보였다.

“그래, 은별이가 어느 유명한 학원에 다닌다 한들 이런 일 안 해 보고 어떻게 돈의 소중함을 알겠니? 고생했는데 우리 시원한 음료라도 마시러 갈까.”

“싫어요. 음료 하나에 얼만데. 그거 팔려면 얼마나 힘든데요. 집에 가서 물 먹어요.”

모녀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시장의 기본원리도 터득

부천 오정구에 있는 은별이의 집 거실에는 각종 상장을 넣은 파일이 여러 권 놓여 있다. 미술과 글짓기에 소질이 있는 은별이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각종 대회에서 받아 온 것들이다.

상장에 따라오는 상금도 많아서 은별이가 1년에 받는 상금과 상품권을 합치면 족히 100만 원이 넘는다. 이것과 벼룩시장에서 번 돈을 합쳐 은별이는 최근 자기 방에 쓸 가구들을 새로 장만했다.

은별이 방에는 누군가 쓸 만한데도 버리고 간 학용품들이 한가득이다. 학교에서 교실 청소하면서 수집한 것들도 있다. 이런 학용품들은 죄다 은별이가 챙겨 벼룩시장에 가져간다.

아무리 ‘절약 소녀’라지만 유명상표 옷 사 입는 친구들이 왜 안 부러울까.

하지만 은별이가 벼룩시장에서 배운 것은 ‘돈의 소중함’뿐만이 아니다.

“벼룩시장은 우리나라 경제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아요. 장사하는 저 같은 사람들은 기업이고, 물건 사는 손님은 가계고, 시장을 마련해 준 부천 YMCA는 정부가 아닐까요. 또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도 남들에게는 꼭 필요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은별이는 경제와 시장의 기본원리를 이미 터득해 가고 있었다. 올해도 벼룩시장에는 계속 나갈 거란다.

글=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사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평가

은별이의 어머니 김효경(43) 씨는 여느 부모가 그렇듯이 딸에게 미안한 점이 많다. 다른 부잣집 부모처럼 어린 자식에게 평소 많은 것을 베풀지 못 한다는 것. 김 씨는 “아이들은 원래 비싼 물건을 보면 사고 싶고, 예쁜 장난감을 보면 갖고 싶기 마련”이라며 “항상 딸을 보면 고맙고 또 안쓰럽다”고 한다. 그래서 은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올해는 비용 부담이 있더라도 경제단체 등에서 주관하는 경제캠프에 한 번 보내 줄 생각이다. 얼마 전에는 은별이가 글짓기대회에서 타 온 상금으로 고등학생인 오빠의 참고서를 사 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은별이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됐다. 은별이가 자신의 대학 등록금은 직접 마련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은별이를 달래기 위해 “빌린 돈만큼은 대학 입학 때 돌려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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